주간동아 307

2001.11.01

기름밥 30년 외길인생 ‘오토바이 대부’

  • < 성기영 기자 / 부산 > sky3203@donga.com

    입력2004-11-16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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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름밥 30년 외길인생 ‘오토바이 대부’
    공장을 둘러싼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공장 앞마당으로 100cc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달려오더니 기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100cc에 오토바이에 딱 어울리는 체구의 한 사내가 가볍게 내리더니 “안녕하십니까” 하며 손을 내민다.

    부산에 가면 오토바이 기름밥만 30년 먹다가 토종 오토바이 제조업체 사장이 된 ‘오토바이 박사’가 있다는 말에, 머리에 적당히 서리가 앉은 희끗희끗한 중년을 기대했던 기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왼쪽 가슴에 ‘대표이사 이경택’이라고 쓰인 명찰을 단정하게 단, 이제 마흔 갓 넘어 보이는 이 사내에게서 30년 기름밥 먹어가며 고생한 흔적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와 이력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명함을 건넨 이경택 사장(53)은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을 그 자리에 세워두고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테스트 좀 끝내고 오겠습니더”.

    (주)한솜모터스 이경택 사장은 이런 식으로 전날 만들어지는 오토바이 완제품을 직접 타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도 출하된 40대의 오토바이 중 10대를 뜯어 다시 만들라고 지시했다. 현장 근로자들보다 오토바이에 대해 아는 게 더 많아 보인다. 오히려 근로자들이 “완제품 검사 과정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사장님이 타보기만 하면 자꾸 문제가 생긴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형편이다. 이사장은 오토바이 소리만 듣고도 중심이 어느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는지, 어느 부위의 볼트가 덜 조여졌는지 한눈에 알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기름밥 30년 외길인생 ‘오토바이 대부’
    이씨가 오토바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8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 일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굶기를 밥 먹듯 한 이씨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계공장, 목공소를 전전하며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안 해본 게 없었다. 그러던 중 오토바이 부품 판매상을 하는 매형의 권유로 ‘반강제적으로’ 오토바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기름밥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눈 딱 감고 10년. 결혼 다음해인 78년에 이씨는 ‘대원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오토바이 부품 판매상을 차렸다. 지금도 부산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치고 ‘대원상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이 바닥의 ‘대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사장의 ‘오토바이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품 판매상을 10년쯤 운영하면서 소비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불편해하고 어떤 오토바이 부속을 원하는지 속속들이 알게 된 그는 이를 종합하기만 해도 오토바이 한 대쯤 거뜬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국내 오토바이 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혼다나 스즈키의 기술을 받아들인 두 개 업체 외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머릿속에서만 구상해 오던 외국업체와의 기술 휴가 없는 ‘국내 제3브랜드’의 꿈은 지난 99년 드디어 이루었다. (주)영광산업을 설립하고 완성 오토바이 수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 베트남 시장을 목표로 오토바이 수출에 나선 결과 창립 첫해에만 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외국 업체와 기술 제휴한 기존 메이저 브랜드들이 이들과의 계약 조건 때문에 수출 시장에 나서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애초에 국내 소비자를 위한 내수 판매는 2004년쯤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엔진 따로 부품 따로 수출해 베트남에서 조립 생산해 판매하다 보니 완성 오토바이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예 국내 시장에 먼저 출시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기로 결심했다. 내수 판매를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7월. 아직 1300대밖에 팔지 못했지만 주문 요구가 폭주하는 것을 보면 ‘제3브랜드’ 진출은 이미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대한민국의 ‘철가방’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 오토바이를 타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작은 체구에 수줍음을 타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이사장에게는 묘한 오만함이나 자신감 같은 게 늘 배어 있다.

    오토바이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왔고 2남1녀를 교육시켰으니 오토바이는 이씨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씨 인생의 버팀목인 오토바이에 대한 일반의 시선은 ‘과부 제조기’ ‘달리는 살인무기’ 등 온통 험악한 별명만 잔뜩 붙어 있을 뿐 운송 수단으로서의 기능이나 실용성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 형편이다. 평생을 오토바이와 함께 살아온 이씨에게 불만이 아닐 수 없다.

    “오토바이가 ‘과부 제조기’라면 자동차는 뭔가요. ‘몰살 제조기’라고 해야 하나요? 자동차 사고가 훨씬 더 위험하고 많은 사람이 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오토바이만 갖고 그러는 거죠?”

    쉰이 넘은 나이에도 집에 100cc짜리 자가용 오토바이를 사다 놓고 틈날 때마다 즐겨 타는 이사장은 실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보면 교통경찰관의 단속 태도에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름밥 30년 외길인생 ‘오토바이 대부’
    “위반한 것도 아닌데 오토바이 탄 사람은 무조건 세워놓고 보는 거예요. 게다가 오토바이 탄 사람에게는 무조건 반말이더군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잡느냐”고 따지면 “폭주족도 많고 어쩌고…” 하면서 얼버무려요. 그러면 일부러 헬멧 벗고 얼굴을 보여주면서 이 나이에 폭주족 하겠냐고 물으면 머쓱한 표정을 짓더군요.”

    오토바이와 30년을 함께한 오토바이 박사인 줄 모르고 그를 잡는 교통경찰은 잘못하면 꼼짝없이 그에게 붙잡혀 ‘오토바이 강의’를 듣는 일도 있다고. 요즘 부모치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10∼20대 자식이 있으면 ‘도시락 싸들고라도’ 말리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사장은 예외다. 25세 된 아들에게 언제든지 오토바이를 타라고 적극 권한다. 학교에서 장래희망에 대해 적어오라면 ‘아버지 사업 이어받아 발전시키기’라고 또박또박 적어 내던 아들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토바이가 그렇게 위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직원들에게는 괜찮다고 하고 내 자식에게는 오토바이가 위험하니 타지 말라고 한다면 모순 아닌가요? 안전하게 잘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자식에게도 오토바이를 타라고 권하고 나서는 ‘오토바이 박사’ 이경택씨의 ‘오토바이 인생’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악수를 나누고 자동차로 공장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그는 이미 다른 오토바이를 탄 채 시동을 걸고 있었다. 또 사장님의 오토바이 테스트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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