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7

2001.11.01

“쌈짓돈 털어 며느리 금반지 준비했는데…” 있다

4차 이산 상봉 대상자들 ‘만남’ 연기에 큰 충격 … 병석 드러누운 채 혈육 사진만 어루만져

  • <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11-16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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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쌈짓돈 털어 며느리 금반지 준비했는데…” 있다
    어머니가 쌀 세 말을 이고 포구까지 30리 길을 따라나섰어. 피란길에 배곯을까 걱정돼서 말이지…. 세월이 지나니까 딴 거는 다 가물가물해지는데 어머니의 그 말은 자꾸 생각이 나….”

    할아버지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니 금세 눈물이 흘러내렸다. 50년 전, 징집을 피해 고향을 떠난 강일창 할아버지(75). “곧 볼 수 있겠지? 미국이 (아프간)전쟁 끝낼 때까지 잠깐 미뤄지는 거겠지? 이러다가 혹 딴 사람이 가는 건 아니겠지?”

    지난 10월10일, 남북은 4차 이산가족 상봉 일정에 합의해 최종명단을 교환했다. 200명의 후보자 가운데 가족이나 친지의 생존이 확인된 100명이 최종 선발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이틀이 지나지 않은 12일 오전.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담화를 통해 10월16일로 예정된 4차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다고 남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이유로 남측이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 순조로운 대화와 내왕이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방북자 소집을 앞두고 밤잠을 설치며 가슴을 설레던 100명의 이산가족은 갑작스런 연기 통보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강일창 할아버지가 상봉이 연기됐다는 공식 통보를 받은 것은 지난 13일이었다.



    강할아버지가 개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향 황해도 배천을 떠나온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51년. 9남매 가운데 장남인 그와 큰동생만 전선을 뚫고 강화도행 ‘야매배’(밀항선)에 올랐다. 가장 눈에 밟힌 것은 “큰형님, 큰형님” 하며 유난히 자신을 따른 20년 터울의 막내동생 운창씨(당시 6세)였다.

    이산가족 명단 교환 과정에서 막내동생의 생존을 확인했다. 방북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은 후 노인의 마음은 소년처럼 달떴다. 북한의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자기 식구들 안부 물어달라는 동향 출신 친구들의 부탁도 미안한 마음으로 꼬박꼬박 적어둔 참이었다.

    “세월을 잘못 만난 탓이지. 누구를 원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이번에도 또 글렀구나 생각해야지, 다른 수가 없으니까.” 강할아버지는 50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못 기다리겠느냐고 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주원태 할아버지(82)는 처음에는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했다. “그건 참 말로 할 수 없는 심정이지. 아예 생각 안 하려고 그래요, 그냥 잊고 있으려고. 진짜 만나야 만나는 거지, 또 미뤄지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

    “쌈짓돈 털어 며느리 금반지 준비했는데…” 있다
    상봉이 확정된 후 할아버지는 북한의 딸에게 보여줄 낡은 사진 한 장을 품고 다녔다. 지금의 아내에게는 감춰둬야 했던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올린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었다.

    결혼 이듬해 딸 윤옥이 태어났고 부부는 오순도순 행복한 삶을 만끽했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이었다. 주씨가 장사를 위해 서울에 나가 있던 사이 38선 왕래가 어려워져 가족이 헤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주할아버지는 갖은 고생 끝에 가족을 데리러 이북으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세 살 난 어린 딸을 데리고 경계병의 총구가 번뜩이는 철조망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고 혼자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길이었다.

    서울에 내려와 혼자 산 지 7년 만에 맞이한 12세 연하의 아내에게는 한 번도 이북 식구들이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내색을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받는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귀가 번쩍 뜨였지만 쉽게 나서기도 어려웠다. “이 양반이 도통 내색을 안 하기에 내가 억지로 신청하라고 떠밀었어요. 살아 있다고 해서 데려와 살 것도 아니고, 이 나이에 무슨 질투며 샘이 있으랴 싶었어요.” 아내 최명희씨(70)의 말이다.

    처는 언제 죽었는지, 딸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남편과 아이들은 있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주할아버지에게 전달된 통지서에는 아무 내용도 없이 ‘생존’ 두 글자만 찍혀 있었다. 그래도 통지서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어린 것이 몸도 약한 제 엄마랑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막상 만난다고 생각하니 물어볼 말도,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지.” 그런데 평양행 비행기삯 20만 원을 적십자사에 부치러 은행에 다녀온 사이 상봉연기를 알리는 전화가 와 있었다.

    “며칠 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적십자사에서 편지가 왔더구먼. 물론 그 사람들이 일부러 미룬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우리 같은 사람 마음 타는 거 신경 쓰기는 할까, 생각하면 부아도 나.” 답답한 듯 소리를 높이는 주할아버지의 목에 힘이 잔뜩 실렸다.

    “쌈짓돈 털어 며느리 금반지 준비했는데…” 있다
    올해 여든일곱의 권지은 할머니는 방북이 연기된 후 며칠 동안 앓아누웠다. 이북에 두고 온 막내아들 이병립씨(60)를 만난다는 생각도 노인에게는 큰 부담이었지만 그나마 상봉이 미뤄져 언제 성사될지 모른다는 소식은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어 자리를 털고 앉았지만 어렵지 않게 동네를 돌아다니던 기력은 크게 쇠했다. 큰아들 병주씨(66)는 “말수가 많이 줄어들고 멍하니 앉아 계시는 때가 많아 걱정”이라고 말한다.

    권할머니는 47년 월남하면서 여섯 살 된 막내만 남겨두고 왔다. 한국전쟁중에 막내아들을 찾으러 가려 했지만 ‘곧 통일된다는데 그때 가면 되겠지’하는 생각에 잠시 미룬 것이 이제 와 생각하면 그렇게 한스러울 수 없다고 한다. 중국이나 미국을 통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으나 그게 돈 있는 사람들 얘기지 가난한 살림으로는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다.

    권할머니는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상봉자 발표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혹시 떨어지면 어떡하나, 막내아들 얼굴도 못 보고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산가족 상봉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권할머니는 쌈짓돈을 털어 손자들에게 줄 내의와 며느리에게 직접 끼워줄 금반지를 맞춰두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언제쯤 막내아들 가족에게 건네줄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선물 꾸러미를 만져보며 막내아들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권할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권할머니에게 막내아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병립아, 엄마는 잘 있다. 너는 잘 있니….” 권할머니는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야 오죽 많으랴. 그러나 목이 메인 권할머니는 그저 울음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이제 그만 하시는 게 좋겠다”는 가족의 만류에 인터뷰를 마쳤다. 권할머니는 기자에게 언제쯤 북한에 갈 수 있을지 아느냐고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구 살아야갔지요? 만나게 해준다고 했으니 지키기는 지키갔디. 근데 내가 이렇게 아파서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갔어요. 그놈의 세월이 문제야, 세월이. 요새는 하루가 다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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