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8

2000.01.20

이상훈의 좌절과 도전

  • 입력2006-06-21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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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훈의 좌절과 도전
    프로야구 투수 이상훈(30)이 고려대에 재학하던 시절 그의 별명은 ‘빠삐용’이었다. 이 대학 야구부 합숙소를 무려 17차례나 이탈해 동료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훈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고인이 된 당시 최남수 고려대야구감독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상훈은 대학 3학년 때까지 잇따른 숙소이탈로 경기에 출전하지도 못했으나 최감독은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끝까지 격려했다.

    대학 4학년 때인 92년 성균관대와의 경기에서 14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 일약 스타가 된 이상훈은 93년 당시 최고액으로 프로야구 LG트윈스에 입단했다. 그는 이때 곧장 최감독을 찾아 보은의 인사를 올렸다. 몇 년 전 최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가장 슬퍼한 사람도 이상훈이었다.

    대학시절 이상훈을 괴롭혔던 것은 가난이었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던 이상훈은 궁색한 가정형편 때문에 좌절하고 방황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투쟁심이 강했던 이상훈은 퉁명스러운 말투와 쏘아보는 듯한 눈빛 때문에 때때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심과 도전정신은 그가 프로야구 투수로서 성공하는데 커다란 힘이 됐다. 어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배포를 가졌고 가끔 화를 부르긴 했지만 강타자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맞섰다.

    이상훈은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투수가 되면서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했다. 97시즌 뒤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야구 글러브를 처음 꼈을 때부터 메이저리그는 그의 꿈이었다.

    좌절은 또 한번 찾아왔다. 97년 겨울 미국 현지에서 가진 공개테스트는 최악이었다. 훈련부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상훈은 몸값이 폭락한 끝에 일본 프로야구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듬해 그는 일본에서조차 2군으로 추락했다. ‘정교한 일본 야구에 적응하기에는 구질이 너무 단조롭다’는 비판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99년 화려하게 재기했다. 지난 시즌 초반 주니치 드래곤스의 선발투수로 뛰다 코칭스태프의 요청으로 셋업맨으로 변신한 그는 위기 때마다 특유의 배짱을 앞세워 깔끔한 해결사 노릇을 했다. 정규 시즌이 끝나자 주니치는 재계약을 희망했지만 이상훈은 다시 메이저리그로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일본에서 메이저리그 못지않은 연봉과 쾌적한 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그는 원래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성격이다.

    지난달 이상훈은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와 535만달러에 2년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그는 사상 최초로 한국과 일본,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선수가 됐다. 인생의 목표에 한발 더 성큼 다가간 셈이 됐다. 이상훈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당당히 부딪쳐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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