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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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짝짓기가 아니라 ‘힐링’이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2-18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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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짝짓기가 아니라 ‘힐링’이다
    닳고 닳은 게 사랑 이야기다. ‘구애’ ‘짝짓기’에 어려움을 겪는 수컷과 암컷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인류 시원과 동시에 시작됐을 개연성이 크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한 번에 수억 마리 정충을 배출하는 것에서 능히 짐작하듯 수컷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씨를 널리 퍼뜨리도록 결정돼 있다고 한다. 반면 한 번에 난자 하나만 생산하는 암컷 인간은 수많은 배우자 후보 중 고르고 골라 하나의 상대만 선택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고 하니, 짝짓기가 빚어내는 온갖 희비극의 교향곡은 여기서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러브스토리는 갖가지 서사와 예술 형태로 수천 년 동안 반복돼왔다. 지금도 최소 1년에 몇 번씩은 귀에 익숙한 레퍼토리를 들어야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같은 수많은 변종을 낳은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다. 올해도 극장가에는 밸런타인데이를 전후해 어김없이 로맨스영화 몇 편이 개봉했다. 그중 성인을 위한 가장 빼어나고 흥미로운 러브스토리는 할리우드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다.

    ‘태양 아래 새로울 것 없는 러브스토리’의 진부함으로부터 이 영화를 구원하는 첫 번째 요소는 요샛말로 ‘멘붕’(‘멘털 붕괴’ 줄임말로 충격이나 혼란에 빠진 정신상태를 뜻하는 인터넷 은어) 상태인 등장인물들이다.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위장병 한 번 앓지 않은 사람 없듯이, 우리는 모두 마음의 병 하나씩 달고 살지 않을까. 이 작품에 나오는 이들도 그렇다.

    먼저 남자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 분)은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인물로, 정신병원에서 8개월간 치료받고 퇴원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집에 돌아온 날,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충격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내 정부를 죽도록 두들겨 패고 결국 정신병 환자 신세가 됐다. 그 덕에 직장도 잃고 아내는 떠나버렸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 생각하고, 집착에 가깝도록 재결합을 시도하지만 현실은 ‘부인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이다.

    ‘멘붕’ 남녀의 특별한 로맨스



    사랑은 짝짓기가 아니라 ‘힐링’이다
    퇴원 후 부모 집으로 온 팻은 아내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 막역한 사이인 친구 부부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다. 그 자리에서 친구 아내의 여동생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분)를 만나는데, 이 여자 역시 만만치 않은 멘붕 증세를 보인다. 사랑하던 남편을 사고로 잃은 뒤 직장 동료들과 돌아가며 잠자리를 갖다 해고된 처지다.

    ‘정조’를 지키지 않은 아내 때문에 발작에 가까운 폭력을 휘두르다 정신병 판정을 받은 남자, 그리고 배우자와 사별한 슬픔을 상대 불문 잠자리에 의지해 벗어나려는 여자. 멘붕의 양극단에 선 두 남녀의 만남이 순조로울 리 없다. 첫 만남부터 날이 서고 삐딱한 대화가 오간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낀다. 동병상련의 마음일까. 위아래 동네에 사는 팻과 티파니는 우연처럼 자꾸 마주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인생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먼저 ‘돌직구’를 던진 것은 여자 쪽이다. 티파니는 전 직장 동료들에게 그랬듯이 팻에게도 첫 만남 이후 “나와 잠자리를 갖자”고 유혹한다. 아내 외도로 만신창이가 된 팻에게 티파니 행동이 달가울 리 없다. “난잡한 여자”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티파니의 대시는 계속되고, 팻은 방어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티파니를 완전히 내치지는 못한다. 그러던 중 티파니가 새로운 거래를 제안해온다. 자신이 팻의 편지를 그의 아내에게 대신 전해주면 자신과 함께 댄스대회에 출전하자는 것. 여전히 자신과 아내는 사랑하는 사이며 재결합만이 인생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팻은 티파니의 제안을 수락한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마음의 병은 강박이나 히스테리 등 다양한 증세로 나타난다. 아내 외도로 큰 상처를 받은 팻은 결혼과 정조에 대해 결벽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작은 거짓말조차 극도로 혐오한다. 누군가 자신을 속이려 하고 공격하려 든다는 ‘피해망상’ 때문에 발작적으로 분노가 폭발한다. ‘분노조절 장애’다. 티파니는 어떤가. 자신의 무관심과 ‘섹스리스’ 부부생활이 남편을 불의의 사고로 몰아갔다는 자책감 때문에 무분별한 육체관계에 집착한다. 남을 돕다 사망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타인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베풀려는 강박적 태도로도 나타난다.

    정신병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팻은 타인과 세상을 ‘불륜의 아내’로 ‘치환’하면서 과도한 집착과 분노 성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티파니에겐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이가 남편을 ‘대체’하는 존재다. 증상은 다르지만 이들의 무의식 속엔 공통적으로 ‘내 잘못을 고치기만 하면 아내나 남편이 되돌아올 것이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이 자리 잡고 있다.

    ‘결핍된’ 존재에서 자존감 회복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두 주인공뿐 아니라 다른 인물 모두 ‘결핍된 존재’로 그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팻의 아버지(로버트 드니로 분)는 아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 풋볼 열혈 팬인 그는 ‘아들(팻)과 함께 경기를 봐야 응원하는 팀이 이긴다’는 징크스에 집착한다. 그동안 아들에게 잘 해주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사랑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무의식의 소망이 강박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모든 결핍과 멘붕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자아 응시, 그리고 교감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내밀한 상처를 가진 남녀가 우연히 만나 호감을 느끼지만 오해를 거듭하고 티격태격하다 결국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된다는 수없이 반복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반복한다. 그러나 단순히 ‘짝짓기’ 해프닝을 다룬 빤한 연애담이 아니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성장담’이자 ‘힐링가이드’로서 탁월한 매력을 지녔다. 그것은 마치 SBS TV ‘짝’에서 미혼남녀편보다 ‘돌싱’ 특집이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이유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러브 이즈 힐링, 힐링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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