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반포근린공원 내에 있는 심산기념관. 이 건물 지하 5층 ~지하 3층이 한전의 변전소다.
이 과정에서, 변전소 매입을 담당한 한전 관계자는 이 사실을 알고도 2개월 동안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내부자 고발로 이런 정황을 알아낸 한전 감사실은 지난 5월 중순 감사에 착수했지만 두 달이 넘도록 끝을 못 내고 있다.
지하변전소 건립은 서초구의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한전 경인건설단 남서울건설소가 2006년 6월 서초구청,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이하 심산사업회)와 3자 협약(‘복합건물 건설 협약’)을 체결하면서 추진됐다. 협약은 심산사업회가 심산기념관(지하 2층~지상 3층)과 변전소(지하 5층~지하 3층)를 지은 뒤 기념관은 서초구청에 기부하고, 변전소는 남서울건설소에 돈을 받고 매각한다는 게 골자.
과실지급 94억원 4개월치 이자 3억 원
문제는 2007년 11월 남서울건설소가 심산사업회, 그리고 심산사업회가 선정한 도급 건설업체 K건설과 별도 3자 협약(‘복합건물 건설에 관한 약정서’)을 맺으면서 비롯됐다. 별도 협약서에는 2006년 협약 때는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변전소 완공 뒤 매매대금을 심산사업회뿐 아니라 도급업체 K건설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K건설은 별도 협약서를 근거로 같은 해 12월 신한은행에 매매대금 채권을 양도하면서 90억 원을 대출받았다. 2010년 3월로 예정된 변전소 준공 뒤 남서울건설소로부터 받게 될 매매대금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다. 변제기일은 올해 6월 30일로, 기한 내 대출금을 갚지 못할 경우 남서울건설소가 대신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변전소가 올 1월 완공되자 남서울건설소는 최초 협약과 별도 협약에 따라 감정평가기관이 책정한 변전소 매매가격(124억 원)을 심산과 K건설에 각각 지급했다. 변전소 매매 계약금 30억 원은 지난 2월 심산사업회 계좌로, 잔금 94억 원은 등기 인수를 마친 후인 3월 4일 K건설에 지불했다.
원칙대로 하자면 한전은 K건설이 대출금 90억 원을 갚은 것을 확인한 뒤 매매대금을 지불해야 했다. K건설이 빌린 돈 90억 원을 갚지 않을 경우 한전이 이를 모두 변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전 측은 “남서울건설소 담당직원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인수인계가 잘못돼 그런 일이 벌어졌다. 새로 일을 맡은 직원은 K건설이 변전소 매매대금을 담보로 90억 원의 돈을 빌려간 걸 전혀 알지 못하고 대금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한전 남서울건설소 측이 K건설이 이미 매매대금을 담보로 90억 원의 돈을 빌린 것을 안 시점은 그로부터 10여 일 뒤인 3월 중순. 그런데 남서울건설소 측은 당장 90억 원을 떼일 판임에도 이를 한전 본사에 알리지 않았다. 한전 측은 “담당 직원이 자기 선에서 해결해보려고 그런 것 같다. K건설 측이 90억 원을 바로 갚아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듯 보인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K건설은 90억 원을 바로 갚지 않았다. 94억 원의 매매대금을 한전으로부터 받고도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않은 것. K건설이 90억 원을 갚은 시점은 변제기일 마지막 날인 6월 30일이다.
한전 측은 “과실 지급에 대한 잘못은 인정한다. 하지만 사연이 어떻게 됐든 K건설이 90억 원을 갚았기 때문에 한전을 포함해 누구도 손실을 입지 않았다. 감사 결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매매대금 지급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한전 측의 설명대로 손해를 본 쪽은 없어 보이지만, 한전의 과실 지급으로 K건설이 자금회전에 이득을 본 것만은 사실이다.
K건설이 90억 원의 자금을 은행에서 빌린 시점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2007년 12월, 중소건설업체가 90억 원이라는 거금을 은행에서 자신의 부동산 담보 없이 빌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K건설은 94억 원의 매입 대금을 올 3월 4일에 받고도 6월 30일까지 4개월여 동안 90억 원을 변제하지 않음으로써 94억 원에 대한 4개월치 이자를 챙겼다. 제2금융권 이자(연 5%)로 치면 3억 원에 이르는 액수다. 한전 본사 측도 5월 중순 감사에 들어갔으나 K건설에 대한 고소·고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한전 관계자는 “법무팀에서 고소·고발 여부를 검토했는데 K건설이 6월 30일까지 돈을 갚으면 법적 조치를 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한전 “철저한 감사로 징계”
의문은 또 있다. 한전이 별도 협약까지 체결하면서 시공사인 K건설에 직접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 한전이 변전소 건설과 관련해 2006년 6월 서초구청, 심산사업회와 3자 협약서를 체결할 당시 최초 협약서에는 ‘변전소 건설 뒤 매매대금을 심산사업회가 지정하는 기한 및 계좌에 일괄 납부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1년 5개월 뒤인 2007년 11월 한전은 심산사업회와 시공사인 K건설과 별도 3자 협약을 맺어 ‘매매대금을 K건설이 지정한 금융기관에 입금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한전 측은 “대금 지불 과정을 간편하게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 그것도 감사를 통해 정확히 이유를 밝혀낼 것”이라 설명했다.
K건설이 신한은행에서 90억 원을 대출받은 과정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전, 서초구청, 심산사업회가 맺은 ‘복합건물 건설 협약서’와 한전, 심산사업회, K건설이 별도로 맺은 ‘복합건물 건설에 관한 약정서’에는 ‘변전소가 완공되면 감정평가기관에서 매매가를 책정한 뒤 한전이 대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K건설이 90억 원을 대출받은 2007년 12월에는 변전소가 준공되지도 않은 데다 매매 가격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태. 그런데 K건설은 어떻게 2010년 초의 감정평가기관 매매가(94억 원)를 예상하고 90억 원을 빌릴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신한은행 측은 “당시 대출과 관련해서는 서류상, 절차상, 법률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는 이 사건과 관련, 한전의 고질적인 방만·부실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계현 정책실장은 “숨기고 대충 넘어가려 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직무절차상 문제점, 관리감독 소홀 등에 대해 감사원이 철저히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비리가 있다면 ‘원포인트’ 감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전 감사실 관계자는 다시 한 번 K건설이 변제기일인 6월 30일까지 대출금을 다 갚은 점을 강조하며 “과실 지급 과정을 면밀히 조사한 뒤 잘못한 관계자들은 사규에 따라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