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전’(왼쪽)과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우리 중에서 누가 “난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돈이 인생 최고의 가치가 돼버린 이 시대에는 돈만 벌 수 있다면 ‘타짜’의 불법 노름판에든, ‘작전’의 반(反)합법적인 도박판에든 서로 끼려고 하지 않을까. 욕망 덩어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 타짜 인생은 너무도 흔하게 널려 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부분 목돈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늘 잃는다는 것이지만.
그래서 노름판의 협잡과 속임수는 이제 더는 고발해야 할 범죄와 악행이 아니라 멋지게 살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 됐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구분이 사라진 마당이니, 영화 속 ‘작전’ 세력을 보는 관객의 시선은 공분보다는 선망과 경탄에 기울어져 있지 않을까.
과거 홍콩영화 속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한국 사회의 일상이 됐다.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현실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전하는 미국보다 더 미국화한 세상이다(미국을 물질주의의 천국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국이야말로 어느 나라보다 ‘경제 동물’이 많은 나라-경제 일변도든, 동물의 나라라는 의미에서든-가 됐다.
돈과 성공을 좇아 모두들 앞으로만 돌격하는 우리 사회. 그런 세상은 좀비들의 세계와도 닮았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좀비 영화의 기원으로 불리는 영화다. 좀비는 원래 아이티 부두교에서 살아 있는 시체를 가리키는 용어지만,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영화 속에서 좀비는 뛰지 못하고 비척거리면서도 무한한 식욕으로 사람들을 공격한다. 자기 생각이 없는 이 ‘반인반귀(半人半鬼)’는 오직 식욕이라는 본능에만 충실하다. 그래서 무섭고, 또 불쌍하다.
반인반귀(半人半鬼) 판치는 나라 대한민국
우리는 이 좀비와 무엇이 다른가. 걸신들린 것처럼 먹을 것만 좇는, 아니 아무리 좇아도 배가 고픈 우리들은 좀비와 무엇이 다른가.
독립영화 ‘워낭 소리’는 앞만 보고 뛰는 사람들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는 소리다. 우리네 위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고이자 타이름이다. 독립영화로 신기원이라 할 기록인 10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00만명이 아니라 1000만명이 이 영화를 본들 뭐가 크게 달라질까. 사람들에게 워낭 소리는 단지 잠시 스쳐가는 옛 소리,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거보다 지금, 그리고 미래를 위한 워낭 소리다.
지난 8년간 이 난에서 영화평이라기보다는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와 세태의 한 면을 얘기해보려고 했다. 그 글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어두워서 독자들의 마음만 심난하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워낭 소리는 고사하고 아둔한 좀비 짓만 아니었기를….
이번 호로 이명재의 영화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