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초교 4학년 학생들이 원어민 강사 졸 씨(왼쪽)와 영어수업을 하고 있다.
7월4일 오후 부산 기장군 기장초등학교 1학년 5반 교실.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 강사 트차라 소냐 졸(28) 씨가 출석을 확인한 뒤 학생들과 인사를 한다. “OK~ Let’s start!” 졸 씨가 할머니 그림을 들어 보이자 15명의 학생들은 익숙한 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She is my grandmother!”
일주일에 두 번 졸 씨는 방과 후 4학년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날 수업 주제는 가족관계 소개와 사람 모습 묘사하기. 수업은 네 팀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팀별로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옮기고 해당 말판에 등장하는 그림을 학생들이 영어로 소개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팀의 주사위 숫자는 3. 말을 세 칸 옮기자 아버지가 신문을 보는 그림이 붙어 있다. “Teacher! Here!” 어린이들의 손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온다. “He is my father. He reads a newspaper.”
각 팀은 말판을 한 바퀴 돈 뒤 연습용 문제지(worksheet)에 이날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수업을 마쳤다. 윤희정 양은 “놀면서 공부하는 영어시간이 재미있다. 시간이 금세 간다”며 환하게 웃었다.
기장군이 관내 학생들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 기장군은 부산 전체 인구 360여 만명 가운데 8만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농어촌이다. 부산 지도를 펴면 오른쪽 맨 끝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울산, 남쪽으로는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다. 고리원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군이 영어 특성화 사업에 나섰다는 소식에 기자는 반신반의했다. 부산에서 자란 기자의 머릿속에는 ‘기장=시골’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그것도 군이 직접 나서 영어 특성화 사업을 진행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원도 완벽하게 마련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활한 영어 특성화 사업 지원 위해 교육지원계 신설
최현돌 군수(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캐나다 요크리전 교육청 관계자와 업무협약을 맺은 뒤 증서를 보이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종복 전 기장군 의장, 오른쪽 맨 끝은 김쌍우 전 부의장.
“2006년부터 원어민 강사를 배치해 정규 수업시간에 원어민 강사가 직접 수업을 합니다. 방과 후에도 관내 19개 초·중·고교에 원어민 강사를 파견해 방과후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요. 현재 230명이 방과후 수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장군 하해천 교육지원계장의 설명이다. 하 계장은 “방과후 수업 참석자 중 지필고사와 인터뷰를 통해 우수 학생을 뽑아 여름 및 겨울방학 때 캐나다로 어학연수(4주)를 보내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인원수는 각 30~50명. 당연히 방과후 수업 신청자는 쇄도했고 수업 참여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최현돌 군수와 군 의회 관계자들은 관내 학생들이 우수 프로그램에 장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난달 캐나다 요크리전(York Region) 교육청과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원활한 영어 특성화 사업 지원을 위해 7월7일자로 교육지원계도 신설했다.
해외 어학연수 선발에서 탈락한 학생들은 ‘글로벌 청소년 영어캠프’에 참여하면 된다. 방학기간에 기장군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리는 이 캠프는 각 기수별로 4박5일 일정으로 300명이 참가할 수 있다. 이 캠프의 장점은 원어민 강사들과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영어 삼매경’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원어민 강사는 지난해 7월 계약을 맺은 YBM 에듀케이션에서 선발, 관리하고 있다. YBM 차경심 대리는 “외국인 강사는 4년제 정규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 소유자로, 법무부가 발급하는 E-2(영어회화 지도) 비자 소지자여야 한다”며 “인터뷰와 일정 기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학교에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300억원 재원 안정적 확보 Let’s go
영어 특성화 사업을 장기적으로 운영하려면 안정적인 재원 마련은 필수일 터. 최 군수는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지원되는 전력산업기반기금과 발전사업자 지원금, 지역개발세 등 300억원가량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면서 ‘걱정 붙들어 매라’는 눈치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학교시설 지원 등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왜 영어일까. 안경순 주민생활지원과장은 “점점 강조되는 영어의 필요성과 최 군수의 어릴 적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최 군수가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 때 선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배운 미역, 광어 양식 등 선진 수산기술 덕이었다. 당시 최 군수는 일본어 사전 한 권을 들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외국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 당시인 2005년, 최 군수가 지원금의 30%를 육영사업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 것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고.
기장군의 ‘미역 영어’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기장초교 최인우(12) 군은 “2년 전부터 학교에서 원어민 강사를 만날 수 있게 돼 영어와 친해졌다. 평소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고 크게 발음하는 게 영어를 익히는 지름길”이라며 자기만의 공부법을 소개했다.
기장군의 ‘영어 따라잡기’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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