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는 끝내 ‘딱 한 놈’을 찾지 못한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호의 마음과 영혼을 무엇보다 괴롭힌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순수함과 자책감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해자였던 영호 역시 희생자였을 뿐이다.
가해자이자 희생자, 그 양면적인 모습은 영호가 경찰이 돼서 고문하는 대목의 묘사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영호는 ‘박하사탕’이 시대 배경으로 하는 1980년대의 한 희생자였다. 잔혹한 고문이 상습적으로 저질러졌던 80년대, 그 고문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연루된 한 소시민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고문시대’의 풍경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모두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 앞에서 주인공인 두 형사가 고문의 충동을 느끼는 대목이 나오지만, 당시 실제 상황에 비춰보면 이건 매우 관대한 묘사였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서는 실제로 고문 피해자들이 잇따랐다. 용의자로 몰린 10대 소년이 고문 끝에 숨졌고, 정신분열 증세로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용의자도 있었다.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했다가 유전자 감식 결과 무죄로 풀려난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주요 모티프로 쓰였는데, 영화에서는 고문 사실이 빠졌다.
영화는 당시 상황을 설핏 보여주면서 80년대 고문사건들을 비춰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김근태 고문 사건이 있었다.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고문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우리나라 고문의 뿌리가 일제 고문경관과 헌병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확인해준 바 있다.
고문이 왜 문제인가. 도덕적, 윤리적 설명을 넘어서 고문이 진실을 밝히는 데 결코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린 이는 근대 형법의 선각자 체사레 베카리아였다. “고문은 진실의 기준을 피의자 근육의 힘에 두는 것이며, 건장한 악당을 면책하고 허약한 결백자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수단이어서 식인종에게나 합당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과거와 같은 고문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사라졌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다. 요즘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은 일들이 왜 이리 많은지. 우리 사회 전체가 거대한 고문기계에 올려져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