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서민 술이던 보드카는 이제 한국의 트렌디한 바에서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앱솔루트, 스톨리치나야, 그레이 구스(아래 왼쪽부터).
보드카는 원래 약용이었다. ‘vodka’의 어원은 물을 뜻하는 ‘voda’에 ‘작은’ ‘귀여운’의 뜻이 있는 ‘ka’를 붙인 것으로, 약초를 원료로 한 알코올 원액을 그대로 또는 물에 타서 약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됐다. 15세기에 보드카와 비슷한 술이 생산됐고, 16세기에 최초로 보드카라는 명칭이 문헌에 남아 있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드카는 민간 제조 금지, 귀족의 판매독점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전 인구가 1인당 연간 15병의 보드카를 소비한다는 내용이 발표되면서 러시아인들에게는 보드카가 어원대로 ‘물’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보드카의 고향이 러시아라고 해서 요즘 나오는 보드카 브랜드가 모두 러시아산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앱솔루트는 스웨덴산이며 그레이 구스와 시락은 프랑스에서 탄생했고, 스미노프와 스카이는 미국, 벨베디어는 폴란드가 고향이다. 3無(무색·무미·무취) 법칙도 더는 보드카를 대표하는 특징이 아니다. 브랜드별로 차이는 있지만 향이 들어간 보드카, 일명 플레이버드 보드카(flavored vodka)가 유행하기도 한다. 또 본래는 곡물이나 감자가 원료로 쓰이지만 과일, 우유 등에서 추출한 재료로 만드는 보드카도 있다. 일각에서는 곡물이나 감자가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은 보드카로 명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최근 이 같은 보드카의 정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러 1인당 年 15병 소비 … 보드카 인기 전 세계 현상
그러나 현재 보드카의 인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 드라마 인기의 선봉장이던 ‘섹스 앤 더 시티’에서 한국 시청자들(특히 여성)의 눈길을 끈 것은 패션, 파티 같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었는데 보드카도 그중 하나였다. 주인공들은 파티에서 ‘그레이 구스 코스모폴리탄’을 주문해 마셨고, 자유연애주의자 사만다의 남자친구는 앱솔루트 보드카의 모델로 등장해 싱글 여성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이러한 뉴요커 스타일은 한국에 고스란히 수입됐고, 이제 각종 파티에서 보드카 베이스의 칵테일이 등장하게 됐다. 덕분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마시는 서민적인 술 보드카는 서울의 트렌디한 바에서 다양한 데커레이션으로 이용되는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술이 됐다.
실제로 올해 국내 수입주류 중 보드카의 성장세는 두드러진다. 수입 주류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위스키 수입이 전년 대비 1% 증가한 데 반해, 국내 보드카 시장은 지난해 88만 달러를 수입해 전년 대비 31.6% 성장률을 보였다. 판매량도 지난해 약 4만2000상자(1상자 9ℓ기준)가 팔려 전년도보다 13% 증가했다. 올해 3월 진로발렌타인스에서 순수 러시아산 보드카인 스톨리치나야를 런칭한 데 이어 9월 바카디코리아가 슈퍼 프리미엄 보드카 그레이 구스를 출시하는 등 그동안 수입되지 않았던 명품 보드카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 잇따라 진출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3만원대 저렴한 보드카에서부터 9만원 선의 프리미엄 보드카까지 가격도 다양하다.
개성 넘치는 술 … 따뜻하게 섞어 먹어도 그만
보드카는 알코올 도수가 40도 정도 되는 독주다. 보통 독한 술은 물에 희석해 마시거나 조금씩 마시면서 즐기지만, 얼큰하게 취하기 위한 술인 보드카는 마시는 법에서도 혀를 사용하지 않고 목으로 단숨에 넘긴다. 그러면 목과 가슴, 배가 금세 타는 듯 뜨거워지면서 취기가 오른다.
하지만 보드카를 쉽고 편하게 마시려면 과일주스나 음료를 보드카에에 섞어 칵테일로 마시면 된다. 이 방법은 보드카 음용의 최근 트렌드이자 보드카를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때문에 국내 보드카 애호가들은 러시아 술을 마신다는 개념보다는 개성 있는 술을 마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각 보드카 업체에서는 브랜드 이미지를 고려해 자사 제품의 맛을 가장 높일 수 있는 칵테일 레시피를 개발해 전파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은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잭다니엘 앤 코크’(위스키 앤 코크)와 같이 ‘그레이 구스 코스모폴리탄’ ‘앱솔루트 모히토’ 등으로 브랜드 명을 강조하는 방법이 그런 예다.
최근 홍대 앞이나 강남 일대 바에서는 보드카 1병과 음료를 시켜 손님이 알아서 섞어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해외의 가든파티에서는 ‘칵테일 뷔페’가 인기라고 한다. 보드카를 비롯해 오렌지주스, 크렌베리주스, 자몽주스, 토닉워터(소다), 각종 리큐르(혼성주)와 가니시(레몬껍질 같은 식재료), 각얼음, 으깬 얼음 등을 차려놓고 자신의 기호에 맞게 만들어 먹는 뷔페라니 흥미롭다.
보드카는 차갑게 마시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 보드카 토디의 경우 겨울과 잘 어울리는 따뜻한 보드카 칵테일인데, 데운 유리잔이나 머그컵에 보드카, 리큐르, 꿀을 넣고 따뜻하게 데운 사과주스를 섞은 뒤 오렌지 껍질로 장식하면 된다. 사과주스가 없다면 물을 끓여 사용해도 좋다. 이번 겨울 여행을 벽난로가 있는 펜션이나 스키장으로 떠난다면 보드카 토디를 만들어 마셔보는 센스를 발휘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층 훈훈한 겨울나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