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이 영화에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자유와 활력을 잃어버린 어느 부르주아 가족이 등장한다. 영화 내내 집 안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는 폐쇄적인 당시 스페인 사회에 대한 은유다. 냉장고 속 잘린 닭발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가족(스페인 국민)의 처지를 상징한다. 집, 나아가 스페인 사회는 보이지 않는 창살이 있는 감옥인 것이다.
평범한 가정을 옥죈 이 사슬의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게 1930년대 내전기 상황이다. 영화 ‘판의 미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 배경이기도 하다. ‘판의 미로’는 소녀 오필리아의 성장영화이자 스페인 내전의 한 기록이다. 플롯은 동화적이지만 그려지는 현실은 끔찍하고 잔혹하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데, 그는 반란군의 진압 장교다. 왕당파를 대표하는 새아빠가 주민과 반란군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잔인하다 못해 초현실적인 호러물을 방불케 한다.
여기서 오필리아는 요정이 안내한 미로에서 용기와 인내, 희생을 시험받는데 당시 스페인 사회가 처한 현실이야말로 바로 이 미로와 같았다. 그리고 이후 40년 이상 스페인 사람들은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미로 안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상처를 입었다. 이제 와서 미로에 갇혀 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아픈 기억을 이기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냥 덮어버리고 망각하거나, 진실을 밝히고 극복하거나. 스페인은 최근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프랑코 사후에도 30년간이나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이제 정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프랑코 독재 시절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뼈대로 한 ‘역사적 기억에 관한 법률’을 의회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지배층인 제1야당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데다, 이른바 ‘침묵협약’이란 것이 장애가 되고 있다. 침묵협약은 프랑코 사후 맺어진, 내전과 독재 시기 군과 공권력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협약이다. 스페인에 들려주고 싶은 한국 시인의 시구가 있다.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 유감스럽게도 이는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얘기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