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바리데기</b> 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304쪽/ 1만원
이중 ‘바리데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팩션으로 분류될 만한 책이다. 팩션(faction)이란 역사적인 팩트와 허구적 상상력인 픽션을 결합한 소설을 말한다. 2004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대교베텔스만)가 폭발적 인기를 누린 이후 우리 문화시장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이정명, 밀리언하우스) 같은 ‘한국형’ 팩션을 표방한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이제 주류문학에서도 큰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팩션은 사실 한국에서 성공이 보장된 분야일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동족상잔, 장기독재 등으로 굴곡 많은 삶을 산 우리 민족은 유난히 역사추리를 좋아했다. 국내 추리소설이 망하다시피 한 다음에도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해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세계사),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같은 역사추리 소설은 자주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최근 팩션의 유행은 한국이라는 국지적 현상을 뛰어넘는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팩션은 디지털 정보시대의 산물이다. 정보 과잉은 정보 부재와 다름없다. 그래서 대중은 허구적인 이야기보다 구체적인 사실, 즉 팩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이론보다는 사람과 사물, 사건 등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원한다. 또 팩션은 검색이라는 인간의 독서습관과 닮았고 게임과도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지적 유희에 어울리는 장르다.
하지만 팩션이 아무리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해도 한 방향으로 휩쓸려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으면서 한 단계 발전한 수준을 보여주는 ‘바리데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청진에서 지방 관료의 일곱 딸 중 막내로 태어난 바리는 아들을 간절히 바랐던 어머니에 의해 숲 속에 버려지지만, 풍산개 ‘흰둥이’ 덕분에 생명을 이어간다. 이후 북한의 경제사정이 급속히 나빠지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가족을 찾아나섰으나 수없이 굶어 죽는 사람들을 목격한 바리는 중국으로 넘어가 옌지(延吉)의 발 마사지 업소에 취직해 안마를 배운다. 그곳에서 만난 중국인 샹 부부와 다롄에서 안마업소를 개업하지만 결국 빚 때문에 영국행 밀항선을 타게 된다. 밀항선에서 생지옥을 경험하고 런던에 도착했으나 샹은 성매매 업소에 팔려가고 바리는 잠시 식당일을 하다가 발 마사지 업소에 취직한다. 빈민가 연립에서 살게 된 바리는 그곳에서 만난 파키스탄인이자 무슬림인 알리와 결혼한다.
생활이 다소 안정되는 듯했지만 미국에서 9·11테러가 터진 뒤 알리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떠난 동생 우스만을 찾아나서면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홀로 딸을 낳았지만 샹의 잘못으로 딸이 죽게 되면서 바리는 식음을 전폐하고 꿈속에서 생명수를 찾아나선다. 그러던 중 오랜 포로생활 끝에 돌아온 알리와 함께 새로운 희망을 품고 둘째 아이를 임신해 안정을 되찾을 즈음 런던 지하철 폭발사고가 터진다.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던 두 주인공 바리와 알리는 9·11테러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타인과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것이 ‘바리데기’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이동과 조화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탈북한 바리와 9·11 이후 설 자리가 좁아진 무슬림 알리를 결합한 것에서 우리는 이미 작가의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다. 작가는 알리 할아버지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구원하는 생명수는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이며, 어떤 지독한 일을 겪더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근대사회 이후 인간이 물건처럼 취급되면서 인간성은 상실되다시피 했다. 그런 인간소외가 물상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성공우화를 즐기고 개나 고양이를 가족처럼 대하며, 팩션을 즐기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현실도피와 다름없다.
바리가 밀항선에서 참담한 생활이나 딸의 죽음과 같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식을 도입한 것도 심각한 현실의 고통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방북과 그로 인한 오랜 유랑, 귀국 뒤의 투옥, 다시 시작한 유럽 생활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 황석영의 대표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21세기 세계시민이 당면한 ‘구체적 현실’에 빨대를 박고 그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역사에서 시사점을 찾으려는 팩션과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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