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 요즘 내가 무슨 일 하고 다니는지 알아요?”
지난해 가을, 오랜만에 만난 권오홍 씨가 뜬금없이 기자에게 물었다. 수첩을 뒤져보니 그때가 10월10일,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였다.
권씨가 털어놓는 얘기는 놀라웠다. 요지는 자신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비선(秘線)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제까지 남북간에 있었던 협상과 대화가 대부분 주고받기식의 거래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이런 식으로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지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구태를 반드시 깨뜨리고, 남북 모두가 상생(相生)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6개월간 기자는 그에게서 정상회담의 추진 상황을 간헐적으로 전해들었다.
권씨는 1989년 무렵부터 북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인물이다. 당시 그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특수사업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북방교역을 개척했다. 중국과 몽골,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등 공산권 미수교국을 상대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남북한이 진정으로 화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평생 과제가 됐다.
그동안 권씨는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국내외 북한전문가 집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극소수인 이유다. 하지만 그의 ‘정보 네트워크’는 웬만한 공식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했다. 북한 내의 소소한 사정은 물론, 북한과 관련된 미국 중국 일본 쪽의 정보까지 그의 사적인 정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권씨는 북한에 관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예컨대 몇 해 전 정부가 실현한 ‘이산가족 화상면담’의 원저자가 바로 그다. 권씨는 2000년 이 아이디어로 통일부의 협력사업 허가를 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2001년 봄에는 남한의 폐비닐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해 실제 평양 력포 지역에 1000t 규모의 공장을 세워 가동시킨 일도 있다.
2월 말 기자가 권씨를 만났을 때,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좌절하고 있었다. 이 정부가 자신이 애써 구축한 대북라인을 외면한 채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며, 남북이 다시금 (그의 표현으로) ‘화장놀이’에 빠져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에게 CD 한 장을 건넸다. 지난해 10월 남북간 비선라인이 개설되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모든 일을 기록한 비망록이었다. A4 용지로 500장이 넘는 방대한 자료를 그는 밤잠 안 자면서 썼다고 했다.
17년간 땀 흘린 북방교역 포기·물리적 위협 ‘각오’
권씨는 낙담한 표정으로 “가까운 시일에 이걸 공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끝장을 보겠다고 덤벼들었던 남북간 ‘화장놀이’가 다시 고개를 쳐든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남북 당국 모두에게 ‘이래선 안 된다’는 경고를 던지는 것뿐이라는 설명이었다.
그가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것은 ‘북한 쪽 일을 이제 접겠다’는 것과 동의어다. 지난 17년간 피땀 쏟아온 일이 허망하게 끝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자료의 공개를 원치 않는 이들이 있는 한) 그의 앞날에 어떤 물리적 위협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자에게도 그의 비망록을 공개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가진 ‘싱크탱크’를 영원히 잃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얻는 것도 크다고 봤다. 최근 6개월간 있었던 일에 대해 권씨나 기자의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알리는 것은, 그럼으로써 이 정부의 아마추어적 대북접근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은,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입에 쓴 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棟
지난해 가을, 오랜만에 만난 권오홍 씨가 뜬금없이 기자에게 물었다. 수첩을 뒤져보니 그때가 10월10일,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였다.
권씨가 털어놓는 얘기는 놀라웠다. 요지는 자신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비선(秘線)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제까지 남북간에 있었던 협상과 대화가 대부분 주고받기식의 거래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이런 식으로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지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구태를 반드시 깨뜨리고, 남북 모두가 상생(相生)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6개월간 기자는 그에게서 정상회담의 추진 상황을 간헐적으로 전해들었다.
권씨는 1989년 무렵부터 북한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인물이다. 당시 그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특수사업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북방교역을 개척했다. 중국과 몽골,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등 공산권 미수교국을 상대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남북한이 진정으로 화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평생 과제가 됐다.
그동안 권씨는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국내외 북한전문가 집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극소수인 이유다. 하지만 그의 ‘정보 네트워크’는 웬만한 공식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했다. 북한 내의 소소한 사정은 물론, 북한과 관련된 미국 중국 일본 쪽의 정보까지 그의 사적인 정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권씨는 북한에 관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예컨대 몇 해 전 정부가 실현한 ‘이산가족 화상면담’의 원저자가 바로 그다. 권씨는 2000년 이 아이디어로 통일부의 협력사업 허가를 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2001년 봄에는 남한의 폐비닐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해 실제 평양 력포 지역에 1000t 규모의 공장을 세워 가동시킨 일도 있다.
2월 말 기자가 권씨를 만났을 때,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좌절하고 있었다. 이 정부가 자신이 애써 구축한 대북라인을 외면한 채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며, 남북이 다시금 (그의 표현으로) ‘화장놀이’에 빠져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자에게 CD 한 장을 건넸다. 지난해 10월 남북간 비선라인이 개설되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모든 일을 기록한 비망록이었다. A4 용지로 500장이 넘는 방대한 자료를 그는 밤잠 안 자면서 썼다고 했다.
17년간 땀 흘린 북방교역 포기·물리적 위협 ‘각오’
권씨는 낙담한 표정으로 “가까운 시일에 이걸 공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끝장을 보겠다고 덤벼들었던 남북간 ‘화장놀이’가 다시 고개를 쳐든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남북 당국 모두에게 ‘이래선 안 된다’는 경고를 던지는 것뿐이라는 설명이었다.
그가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것은 ‘북한 쪽 일을 이제 접겠다’는 것과 동의어다. 지난 17년간 피땀 쏟아온 일이 허망하게 끝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자료의 공개를 원치 않는 이들이 있는 한) 그의 앞날에 어떤 물리적 위협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자에게도 그의 비망록을 공개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가진 ‘싱크탱크’를 영원히 잃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얻는 것도 크다고 봤다. 최근 6개월간 있었던 일에 대해 권씨나 기자의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알리는 것은, 그럼으로써 이 정부의 아마추어적 대북접근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은,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할 ‘입에 쓴 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