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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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기 싫었나, 찾지 못했나 FTA 문건 유출 완전범죄?

단서 일부 확보에도 조사 흐지부지 … 국회 제 식구 감싸기 ‘뒷말’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7-03-21 09: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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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기 싫었나, 찾지 못했나 FTA 문건 유출 완전범죄?
    1월13일 국회 한미자유무역협정특별위원회(이하 FTA특위) 제14차 회의는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은 오전 10시 4분에 시작됐다. FTA특위 위원 30명 가운데 10명만 이 회의에 참석했다. 김종훈 FTA협상단 수석대표가 외교통상부 FTA기획단 직원을 통해 ‘한미FTA 고위급 협의 결과와 주요 쟁점 협상 방향’이라는 제목의 비공개 문건을 위원들에게 나눠준 시각은 10시22분.

    “우리 직원이 죽 배포하겠습니다.”(김종훈 수석대표)

    FTA기획단 관계자는 특위 위원 30명보다 많은 45부를 현장에서 배포했다. 불참한 의원의 좌석에도 문건이 놓였고, 상임위 수석전문위원 및 전문위원 등의 몫으로 15부가 뿌려졌다.

    27일간 조사 뒤 “유출자 확인 불가능”

    닷새 후인 1월18일 ‘한겨레’와 ‘프레시안’에 한국의 협상전략이 담긴 이 문건의 내용이 공개됐으며, 이날 웬디 커틀러 미국협상단 수석대표는 김 수석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보도를 꼼꼼히 잘 봤다”며 웃었다. 미국과의 포커게임에서 패를 보여주고 싸우게 된 꼴.



    “만일 미국 측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피해가 정말 컸을 것이다.”(커틀러 수석대표)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 측이 충분히 예상했을 내용이긴 하지만, 만천하에 한국의 협상전략이 공개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비공개 문건을 흘렸을까?

    찾기 싫었나, 찾지 못했나 FTA 문건 유출 완전범죄?

    국회 FTA 대외비자료열람실.

    27일간 조사를 벌인 FTA특위 대외비문서유출사건조사소위원회(위원장 홍재형·이하 조사소위)는 3월7일 “유출자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수사권이 있는 기관에 의뢰하는 등의 추가 진상규명 의지도 없이 사건을 종결해버린 것.

    시계추를 되돌려 1월13일 오후 1시4분. 이날 회의는 이 시각부터 비공개로 진행됐다. 문건 배포 때부터 162분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던 것. 이 사이(162분)에 유출된 것으로 ‘확인된’ 문건은 이혜훈 의원(한나라당) 몫이 유일하다. 문건 30부에 일련번호를 매겨 의원들에게 배포했다가 회의 뒤 이를 회수했는데, 이 의원 몫으로 배포된 문건이 없었던 것.

    “의원님 자리에 계신가? FTA특위 대외비 문건이 사라졌다.”

    이 의원실의 박종주 보좌관이 FTA기획단의 전화를 받은 때는 비공개 회의가 갈무리된 2시28분을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FTA기획단 관계자는 박 보좌관에게 이 의원의 문건 소지 여부를 물은 뒤, 갖고 있다면 수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의원 몫의 문건이 162분 동안의 ‘어느 시점’에 증발된 것이다. 이 의원은 이날 FTA특위에 참석하자마자 다른 연락을 받고 자리를 떴다고 했다.

    “회의장에 배포된 자료는 들춰볼 겨를조차 없었다. 해당 문건을 보지도 못했으며 회의장을 빠져나올 때도 빈손이었다. 누군가 서류를 슬쩍 가져가려 했다면 내 자리가 출입구와 가까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의원의 주장대로 외부에 개방된 공개회의에서 비공개 문건을 나눠준 외교부에 유출의 1차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의원실로 FTA기획단의 전화가 걸려온 때와 비슷한 시각. 최재천(민생정치모임) 의원실의 J 비서관은 10시22분에 배포됐다가 수거된 최 의원 몫의 문서를 국회 대외비자료열람실(236호)에서 읽고 있었다. FTA기획단은 의원들에게 배포한 문서를 수거한 뒤 대외비자료열람실에 보관하는데, FTA특위 의원 보좌진 중 비밀취급 인가를 가진 보좌관, 비서관, 비서는 이 열람실에서 대외비 문건을 살펴볼 수 있다.

    최재천 의원 몫 문건 유출 사실 확인

    “1월13일은 토요일이었다. 열람실 직원들이 퇴근을 못하고 있어서 눈치가 보였다. 문서를 잠시 살펴보다가 그냥 나왔다.”(J 비서관)

    J 비서관이 이날 읽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된 것으로 ‘확인된’ 또 다른 문건이다. 최 의원 몫의 문건이 앞서의 162분 동안 최 의원, 최 의원 측 인사, 혹은 공개된 회의장을 오간 제삼자에 의해 복사된 것이 아니라면 J 비서관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최 의원이 근거도 없이 자신을 몰아세운다며 의혹을 일축하고 있는 점, J 비서관이 ‘236호를 찾아’ 문건을 열람한 점으로 미뤄본다면 최 의원과 최 의원의 보좌진은 적어도 2시28분 이전엔 복사된 문건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겨레’와 ‘프레시안’이 한국의 협상전략을 보도하기 이전에 236호에서 문건을 열람한 보좌진은 J 비서관(1월13일 열람)과 L 의원실의 N 비서관, K 의원실의 N 비서, S 의원실의 I 보좌관 4명(1월15일 열람)이다. 이들은 FTA특위 조사소위에 증인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았는데, 외부로 유출된 문건이 확인된 2건보다 많다면 N 비서관, N 비서, I 보좌관도 용의자가 된다.

    236호에서의 대외비 문건 열람은 비밀취급인가를 가진 보좌진만 할 수 있다. 신분 및 비밀취급인가 확인 절차를 거친 뒤 해당 의원 몫의 파일에서 꺼낸 문건을 건네받아 열람하는 형식이므로, FTA자료실 열람관리자를 제외하면 최 의원 몫의 문건을 복사해 외부로 유출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J 비서관으로 좁혀진다.

    “236호에서 문건을 들고 나와 복사본을 만든 뒤 원본을 반납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1월15일 자료를 열람한 한 보좌진)

    FTA 문건을 보도한 매체는 ‘한겨레’와 ‘프레시안’, 그리고 KBS와 SBS다. 두 방송사는 1월18일 아침 1보에 해설을 덧붙인 형식이었다. 이들 미디어에 문건을 건넨 사람은 누구일까.

    “최 의원에게 배포된 문건이 유출된 것은 사실로 확인됐다.”

    국정원은 조사소위에서 이같이 밝혔다. 236호의 최 의원 파일에 보관된 문서가 ‘한겨레’ ‘프레시안’, KBS가 보도한 문건의 원본이라고 확인한 것.

    “문건에 적힌 메모를 확인한 결과, 세 언론매체가 보도한 문건과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최 의원에게 배포된 문건에선 한 번 뜯어졌다가 스테이플러로 다시 묶은 흔적도 발견됐다.”(FTA특위 한 관계자)

    그러나 두 문건이 같다고 해서 J 비서관이 문건을 유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2시28분 이전에 문건이 유출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J 비서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문건의 메모는 내가 쓴 게 아니다. 나는 메모하거나 호치키스(스테이플러)로 다시 찍은 일이 없다. 열람실에서 10분가량 문서를 훑어봤을 뿐이다.”

    SBS가 보도한 문건은 최 의원 몫의 그것과는 달랐다. 유출된 것으로 확인된 문건이 2부인 점을 미뤄보면 SBS가 입수한 문건은 이 의원 몫일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제3의 문건이 유출돼 SBS에 건네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아닌가. 이미 유출된 문건과 유사한 필적이 나왔는데 (유출자를 밝혀내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강창일 의원(열린우리당)은 3월7일 조사소위의 결과 보고를 듣다가 이렇게 불만을 터뜨렸다. 조사소위의 조사를 놓고 ‘가재는 게 편’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조사소위는 조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유출 사건과 관련된 의원들을 조사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이 확인한 ‘한겨레’ 등의 보도 문건이 최 의원 몫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도 결과 보고서엔 담겨 있지 않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수사권이 없어 조사에 한계가 있다.”(조사소위 한 위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조사소위의 의뢰를 받고 ‘한겨레’ 등에 보도된 문건(이하 A)과 J 비서관 필적의 동일성 여부를 감정했다[A는 언론사가 보도한 문건을 직접 채증한 게 아니라(언론사는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해당 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이미 보도된 문건을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팩스 수신 등의 방법으로 받은 것을 국정원이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의원들에 대해서는 조사도 안 해

    국과수는 언론 유출 문건에 적힌 필적이 J 비서관의 필적과 문자별 외형적 요건 및 형태적 특징에서 유사점이 발견됐지만, 복사나 팩스 전송 등으로 필적의 왜곡현상이 발생한 A만으로는 동일성을 감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그림기사 참조). 국과수는 조사소위 측에 감정을 의뢰할 땐 원본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조사소위는 결국 유출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3월7일 활동을 마무리했다. 국회의 ‘제 식구 과잉보호’ 속에 문건 유출 사건의 실체가 미궁으로 빠져든 것. 사건 발생 초기 호들갑스럽게 보도하던 언론들도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부 한 당국자의 탄식이다.

    “사실 이번에 유출된 문건은 협상에 큰 피해를 줄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전략이 상대에게 알려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사건이 이런 식으로 종결돼선 안 된다. FTA 추진을 반대하는 것도 좋고, 특종에 살고 죽는 것도 좋다. 그러나 정도(正道)라는 게 있다. 비공개 협상전략을 만천하에 까발린 것은 정도가 아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의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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