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1972년 1월의 어느 일요일, 북아일랜드의 도시 테리. 시민권을 요구하는 북아일랜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영국군은 무차별적으로 발포한다. 아일랜드인들과 세계인의 분노를 산 이날의 사건은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로 불리게 된다. 이 ‘아일랜드판 피의 일요일’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영화화돼 이날의 참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영화는 한 평범한 가정의 저녁 식탁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음 날 이 작은 도시에 닥치는 비극은 그 평화로운 정경만큼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시위 진압에 나선 영국군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모습, 가족을 잃은 이들의 오열하는 장면 등은 한국사의 어느 비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지난해 개봉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블러디 선데이’의 역사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 의한 아일랜드 수난사의 정점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도입부에서 17세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 고유어로 말했다고 해서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영국군에게 맞아 죽는다. 분노라기보다 차라리 서글픔을 자아내는 이 장면은 ‘왜 우리는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라는 절규로 들린다.
이들의 무장저항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수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분쟁의 출발이었다. 이번에는 형(테디)이 자기 손으로 동생(데미언)을 죽여야 한다. 비극이나 한에도 색깔이 있다면, 아일랜드인의 그것은 우리 민족과 닮았다. 흔히 아일랜드인의 기질이 우리 민족과 비슷하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진실인지 모른다.
새해 들어 북아일랜드에 평화 정착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고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비운의 형제, 테디와 데미언의 후예들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정치조직 신페인당이 영국 경찰의 활동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기나긴 분쟁과 유혈의 역사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분명한 점은 평화가 찾아온다고 해도 아일랜드 역사에 새겨진 비극과 수난의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사의 나라’ 영국의 야만의 기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