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성이 명품 브랜드 매장 안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싱글즈’에서 주인공 나난(장진영 분)이 한 말이다. 사실 골드미스는 소수다. 우리나라 30대 미혼여성 대다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싱글’ 나난과 같은 처지다. 연봉 2000만~3000만원 수준의 비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실버미스’에 속한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35~39세 전문직 여성의 한 달 급여는 230만원인 데 비해, 같은 나이대 사무직 여성의 월급은 170만원에 불과하다. 골드미스의 4분의 3 정도를 버는 셈이다. 여기에 보너스나 연말 성과급까지 합친다면 골드미스와 실버미스의 소득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골드미스 되기 좁은 문 … 30대 미혼 여성 대다수는 실버미스
사정이 이렇기에 실버미스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대학교 어학원의 한국어 강사인 조모(여·34) 씨는 “한국에서 미혼여성, 특히 실버미스는 돈을 모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가꾸고 관리하는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옷을 사야 해요. 지난 계절에 분명 샀는데, 다시 그 계절이 되면 이상하게도 입을 옷이 없어요. 그리고 유행도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하고요. 옷만 살 수 없으니까 거기에 맞는 구두와 가방도 사야죠. 그뿐인가요? 석 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야 하고 화장품도 사야 하고…. 한 달 월급으로는 정말 빠듯해요.”
물가는 또 왜 그리 비싼지 모르겠다. 백화점에 가면 블라우스 한 장이 보통 20만~30만원 한다. 코트는 50만원을 훌쩍 넘기 일쑤. 이러니 백화점에 가서 100만원 쓰는 일이 우습다. 그래서 조씨는 주로 세일 기간에 백화점 쇼핑을 한다.
“돈을 아끼려고 동대문 쇼핑몰에서 보세 옷을 산 적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산 옷으로는 맵시가 나지 않는 거예요. 20대 때엔 싸구려 청바지에 면티만 입어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제 몸이 먼저 명품과 보세를 구분하더라고요.”(웃음)
학원강사 노모(여·33)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네가 그 모양이니 애인이 없지”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외모에 더 신경 쓴다고 털어놓았다. 늘 자신감이 충만한 골드미스들은 외모가 어떻든 기죽지 않지만 자신과 같은 실버미스들은 ‘외모까지’ 기죽지 않으려고 더 애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쇼핑을 더 자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월급이 모조리 카드값으로 빠져나갈 때도 있다.
“골드미스는 많이 버니까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사도 괜찮겠죠. 하지만 실버미스는 사고 싶은 게 생기면 먼저 그달에 쓴 카드값부터 계산해야 해요. 그럴 때마다 돈벼락 맞거나, 아니면 ‘돈 많은 남자’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요. 철없는 ‘된장녀’가 부럽기도 하고요. 그거, 아무나 못하는 거잖아요.”
취업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여성.
여자가 나이 들수록 더 결혼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남자들이 나이 많은 여자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이 들수록 결혼에 회의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 들면서 주변에서 ‘주워들은 것’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따지는 것 또한 많아지는 것. 그 때문에 옛 어른들 말처럼 ‘결혼은 철없을 때 해야 한다’는 자조가 실버미스들 사이에서 나온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남자들도 여자들과 똑같이 따진다는 점이다. 나이 많고 능력 없는 여자는, 나이 많고 능력 있는 여자보다 선택될 가능성이 적다. 그래서 박모(여·30) 씨는 결혼에 별 뜻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시집가라는 부모의 잔소리를 피해 3월 마침내 ‘독립’한다. 서른이 넘도록 부모에게 기대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는 것 또한 독립의 한 이유다.
“어느 날 문득, 이 나이에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과연 언제까지 부모에게 기대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부모가 돌아가시면 난 어쩌나 덜컥 겁이 났어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홀로서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 능력으로 독립자금을 모두 댈 수가 없어서 친구와 함께 방을 구했어요. 서울 시내의 멋진 오피스텔을 혼자 얻어 사는 골드미스들이 정말 부러워요.”
이직 어렵고 새로운 도전 하자니 위험부담 커
직장 옮기는 문제는 실버미스들에게 또 하나의 고민거리다. 비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이직이 어려운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 그래서 변호사나 의사처럼 비교적 이직이 쉬운 직업을 가진 골드미스가 실버미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한모(여·34) 씨는 “전문직 여성들을 마냥 부러워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요즘 국제비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실버미스는 한씨뿐만이 아니다. 어머니 세대였다면 학부형이 됐을 나이지만, 이들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서른한 살의 방송작가 이씨는 지금 맡고 있는 프로그램을 마치면 유학을 갈 계획이다. 그동안 번 돈을 다 까먹는 게 아닐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일자리를 못 구하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하지만, “그냥 열심히 해보자”는 각오다. 서른셋 노씨는 지난해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가 되기 위해서다. “서울대 출신의 서른다섯 살 언니가 종로학원 강사 모집에서 떨어졌어요.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요. 그때 깨달았어요. 나이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골드미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실버미스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 조각 남아 있는 꿈과 사랑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 못한다. 영화 ‘싱글즈’에서 나난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럼 어때? 마흔 살쯤엔 뭔가 이뤄지겠지 뭐.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