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원내대표가 5월13일 신임 인사차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를 방문해 박근혜 대표와 환담을 하고 있는 모습.
파행정국을 풀더라도 두 인사를 둘러싼 척박한 여건이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천대표는 연말까지 4대개혁 입법과 내년 예산안, 이라크 파병 연장동의안 처리 등 길고도 험난한 여정을 소화해야 한다. 반대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 박대표의 여정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
4대개혁 입법 처리 여부에 따라 내년 정국은 판이하다. 두 사람의 정치적 위상도 이 정국 기상도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천대표 측이 ‘4대 입법’ 처리에 정치적 승부를 건 이유도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투명한 전망이 천대표 측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를 포위한 내우외환의 세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당내 노선 갈등은 대표적인 ‘내우’에 속한다.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대표 유재건 의원·이하 안개모)은 당의 국보법 처리에 미온적이거나 부정적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일부 개혁당 출신 인사들이 “탈당하라”며 방아쇠를 당겼다. 안개모 인사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안개모 한 관계자는 “지금은 참지만 멍석만 깔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숨을 고른다. 개혁파와 안개모 소속 의원들은 요즘 세 불리기에 열중이다.
천대표의 파트너인 이부영 대표의 언행도 외길 수순을 밟고 있는 천대표에게 다소 부담이다. 그는 요즘 끊임없이 말을 만든다. 11월7일 경기 과천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당·정·청 경제 워크숍’에서 “(우리가) 옳다고 해서 아집과 독선에 빠진 적은 없었느냐”며 ‘자성론’을 제기했다. 단일대오 형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천대표로서는 맥 빠지는 얘기. 그러나 드러내놓고 뭐라 말하기도 쉽지 않다.
4대개혁 입법 처리 여부 최대 관건
이총리의 처신도 서운하기는 마찬가지다. 국회 파행의 책임은 결국 여당, 그것도 원내 지도부 몫으로 돌아온다. 이런 판단에 따라 천대표는 “과거 총리가 국회를 파행시킨 적이 있느냐”는 등의 발언으로 결자해지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총리 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반발 기류를 토해냈다. “당이 갈피를 못 잡으니까 총리가 나서 총대를 멨는데…”라는 볼멘소리가 그것. 개혁 전선을 형성, 강하게 나가지 못할망정 총리에게 사과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불만의 표출이다.
11월8일 여야 원내대표 회담에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원기 국회의장,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손을 맞잡고 있다(왼쪽부터).
천대표를 둘러싼 외환은 더 심각하다. 이총리 발언과 관련 야당의 반발이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당초 야당이 적당한 선에서 회군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야당이 수위를 높여 총리 퇴진론을 들고 나와 경색정국을 한층 꼬이게 만들고 있다. 장기 공전으로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30%선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했던 여당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진 지 오래다. 행정수도 이전 무산으로 충청권에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민심이반’도 여당을 압박한다. 내년 지도부 교체와 관련 ‘큰 꿈’을 꾸던 천대표로서는 이래저래 속타는 일의 연속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속을 헤아리는 사람이 없다. 한 묶음으로 여겨졌던 ‘천·신·정’ 그룹은 이미 시스템이 붕괴된 듯 지원이 없다.
숨겨진 마지막 카드는 있나
이런 분위기라면 4대개혁 입법·정부 예산안·이라크 파병 연장동의안 처리 등은 결코 낙관할 수 없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도 처리 불가로 돌아선다면 천대표로서는 정치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기로에 선 천대표에게 측근들은 강한 리더십을 요구한다. 장렬한 전사론은 강한 리더십의 실천적 수단으로 거론된다. “모든 것을 잊고 ‘개혁’만 생각하고 개혁 투쟁 과정에 장렬하게 전사하라”는 필사즉생론이다. 한나라당을 빼고 국회 일정을 강행하자는 단독등원론은 바로 전사론의 연장책이다. 그러나 천대표는 이런 주장에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천대표는 지금도 대화와 협상에 무게를 싣는다.
이런 천대표를 유난히 관심 있게 쳐다보는 그룹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캠프다. 천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은 박대표의 동선을 조율하는 바로미터다. 천대표가 웃으면 박대표는 울어야 한다. 반대로 박대표가 지도력을 인정받으면 천대표는 패장의 멍에를 뒤집어써야 한다. 현안과 관련 두 사람의 상생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천대표가 시련의 계절을 보내는 것만큼 박대표도 요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 심각하다. 당 내부에서는 수도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 굵직한 정국 현안과 관련, 당 지도부의 대응이 결국 실패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비판론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슈 선점 능력, 정치적 스킬 등과 박대표의 당 운영 능력을 비교해 박대표를 코너로 몰기도 한다.
박대표는 그동안 대여 투쟁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17대 개원 초기 이 리더십은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으며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이총리의 ‘한나라당 폄하 발언’ 대처 방안과 여권의 ‘4대개혁 입법안’과 관련, 박대표의 상생 행보는 혹독한 평가를 불러오는 것으로 끝났다.
10월 말 본회의가 끝난 후 속개한 의총에서 ‘당심’은 그대로 표출됐다. 김문수 의원은 “전쟁에선 대표가 앞장서 나가 희생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동네 골목대장도 이러진 않는다”며 박대표의 지도력 부재를 질타했다. 대부분 인사들은 이런 문제제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와중에 원내수석 부대표인 남경필 의원은 행정수도 특별법 통과에 찬성한 것이 ‘한나라당의 정략적 의도’였다고 발언, 충청도의 분노에 기름을 퍼부었다. 충청권에는 “이제 한나라당은 없다”는 격문이 나붙고 있다.
박대표 측은 김덕룡 원내대표가 일정 부분 몫을 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생각보다 약하다. 김대표의 리더십은 “타이밍을 못 잡고, 분노할 때 분노할 줄 모른다”는 비판에 직면한 상태. 아무에게도 욕을 안 먹으려는 그의 처신은 결국 모든 불만이 박대표에게 직접 향하게 하는 원인으로 이어진다.
대표 취임 3개월, 박대표 측은 지금도 우군이 별로 없다. 박대표 측은 “계파, 계보 정치는 안 한다는 원칙론에 따른 필연”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당내 인사들의 해석은 다르다. 전략, 대안 포용력 부재라는 박대표의 리더십이 ‘외로운 대표’의 가장 큰 배경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총선 때 “변하겠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야 대치정국에서 기득권에 연연한 보혁구도식 노선 투쟁이 예고되는 게 한나라당의 현실이다. 그런 당을 향해 김형오 사무총장은 ‘바보정당’이라고 꾸짖었고 그 욕설은 부메랑이 되어 박대표 앞에 떨어졌다.
당내 인사들은 요즘 대표에게 강경 대응을 권유한다. 박대표 측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명분도 생겼다. 11월5일 노대통령이 MBC 라디오 방송에 출연, 2시간여 동안 주부들과 질의 응답한 것이 발단이었다. 노대통령은 이날 정국 현안인 이총리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이를 들은 야당 인사들이 “야당을 능멸한 것”이라며 성토했다. 특히 박대표 측은 방영은 되지 않았지만 노대통령이 ‘야당도 대통령을 폄하하지 않았느냐’며 이번 사태를 정쟁으로 지칭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강경 대응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파행이 12일째인 11월8일 현재 계류 중인 법률안은 568건. 이 속에는 시급히 처리해야 할 각종 민생·경제 관련 법안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299명 연대 파업 앞에 국민들은 천대표와 박대표의 결단을 촉구한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던 두 인사도 호주머니 속에 숨긴 마지막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전후해 웃는 자와 우는 자는 가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