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서점의 어린이 명랑만화 코너. 다이어트, 미용, 처세 등 실용 만화책들로 가득하다.
“적극적으로 마사지를 해서 작게 만들어야지.”
미용에 관심 많은 여성들이 목욕탕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요즘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만화’ 주인공들의 말풍선에 써 있는 내용이다. ‘7일 안에 얼짱 몸짱 되는 법’이란 제목의 이 ‘순정만화’에서 주인공 수연이는 방송에 출연하고 싶지만 친구들의 비웃음만 산다. 수연이는 ‘얼짱 마스터’의 도움을 받아 ‘얼큰이(얼굴 큰 아이)’에서 귀여운 얼굴로 변신하고 롱다리 가진 ‘얼짱’과 ‘몸짱’ 되기에 성공한다. 수연이는 “꿈꾸는 건 어린이들의 특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만화 ‘연예인처럼 변신하기’는 ‘초라한 외모’를 가진 샛별이가 마법사 할머니를 만나 슈퍼스타 브리트니로 변신해 화려한 연예인으로 활동한다는 내용이다. 만화 사이사이에 ‘몸매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해요’, ‘매니저가 스케줄이나 약속을 잡아주지만 본인 스스로가 약속을 잘 지키는 습관을 갖추지 않으면 힘들어져요’ 같은 실용정보가 들어 있어 어린이가 이미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요즘 서점의 어린이 서가는 동화나 ‘순수’ 만화가 아니라 성인 여성들의 패션지 일부를 옮겨놓은 듯한 실용 만화책들로 채워져 있다. 지난 여름 ‘빨간 마스크’와 ‘무서운 게 좋아’ 시리즈 등 공포 명랑물이 어린이 만화의 트렌드였다면, 올 가을의 트렌드는 어른 세계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실용 순정물이다.
기획 고갈로 따라하기 … 비슷한 책 봇물
‘7일 안에 얼짱 몸짱 되는 법’ 외에 ‘난 너무 날씬한 걸’, ‘날씬해서 미안해’, ‘넌 얼짱 난 몸짱’, ‘남친을 사로잡는 코디파워’ 등 다이어트와 미용을 위한 순정만화와 ‘부자가 된 신데렐라 거지가 된 백설공주’, ‘두근두근 사랑점’, ‘깜짝 인기비결’ 등 처세 순정만화, ‘만화로 보는 아침형 인간’ 같은 처세 명랑만화 등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만화책이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동화책을 주문하다 오랜만에 서점에 나왔다는 학부모 이정의씨(37)는 “어린이 서가 대부분이 미용 만화책 아니면 처세 만화책이라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한 대형서점에서 다이어트에 관련된 만화책을 열심히 읽던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어린이들은 “반 아이들 대부분이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아 인터넷을 많이 뒤져본다. 이런 책은 알기가 쉬워서 더 도움이 된다”며 “쉬는 시간엔 아이들끼리 책에 나온 체조를 따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6학년 여자 어린이는 “패션 모델이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기 때문에 코디나 멋내기에 관해 나온 만화책은 다 읽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실용 만화책들이 붐을 이룬 데는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로 초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 을파소에서 같은 책을 만화책으로 내 역시 성공을 거두고 ‘부자가 된 신데렐라, 거지가 된 백설공주’ 등을 히트시킨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을파소 편집실 문경선씨는 “성인 분야에서도 실용서적이 워낙 강세이다 보니 어린이 분야도 문학과 실용서 사이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책들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면 이미 마음은 20대다. 마사지 방법이 나온 순정만화
만화출판사들은 전통 코믹스 시장의 붕괴가 학습만화와 실용만화의 이상 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두산동아 단행본팀 과장인 만화가 윤상석씨는 “전통 만화책 시장이 사라지자 처음엔 만화가들이 인터넷으로 가거나 학습만화로 갔다. 그러나 학습만화의 기획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데 반해 판매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순정만화 작가들은 쉽게 다이어트나 미용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고, 명랑체 작가들은 성인용 처세술을 만화로 옮긴다. 그러나 어른 책을 만화로 옮긴다고 해서 아이 책이 되진 않는다”고 말한다.
어린이 전용 화장품 매장.
그 대신 만화 장르가 가진 개성과 힘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져버린다.
어린이 동화를 출판하는 동산사 이종훈 대표는 “실용만화는 많이 출판돼도, 만화적 상상력이나 책이 보여주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담고 있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실용 만화책, 단편적 가치관 심어줄 우려
한 만화출판사 관계자는 “어떤 학부형들은 항의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땐 ‘애들이 워낙 똑똑하다. 아이들의 선택권을 존중해주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실용 만화책들은 형식은 만화지만 사실상 단편적인 정보 모음집이다. 따라서 폭력적이지도 않고 선정적이지도 않은 편이다. 어떤 만화책들은 건강한 영양 섭취와 운동법, 시간 아끼는 법, 정리 정돈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강조하기 때문에 만화책보다 실용서를 선호하는 부모들이라면 8000~1만원에 이르는 책값도 아깝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화책들이 가진 더 큰 문제는 세계관에 있다. 실용 만화책에 의하면 일기란 그날 먹은 것을 모두 기록하는 것이고, 친구란 리더십으로 이끌어야 할 대상이며, 운명은 손금과 관상, 타로카드에 나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외모 지상주의와 청년 실업이라는 어른들의 냉혹한 현실을 만화로 통역한 책들을 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꿈과 용기를 갖기보다는 다이어트와 경제적 효용 가치를 선과 악, 행과 불행의 기준으로 삼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건강한 몸과 균형 잡힌 소비자 의식을 갖추기보다는 돈과 몸 그 자체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을 타자화하여 보는 마음의 병을 어렸을 때부터 앓게 될 수도 있다.
‘열두 살에 인생을 준비하라’는 것이 어른들의 잘못을 빨리 따르라는 의미가 아닐진대 아이들의 만화책이 아이들을 조로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의 꿈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