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와지엔키 공원.
흔들리는 핸들을 동남쪽으로 고정시켰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 다시 들르기로 결심을 굳히고 출발했건만. 수도 바르샤바까지 200km 이상을 돌아가는 탓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의 망설임이 자전거 핸들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눈썹 위에 자리할 즈음, 번뇌하는 마음조차 사라졌다. 가고자 하는 길로 접어든 이상, 더 이상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One way ticket(편도표)!’이다.
폴란드 어린이들과 사전 찾아가며 손짓발짓 대화
조그만 상점 하나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일단 멈췄다. 점심을 먹어야 한다.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하고는 싣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음식을 조달한다. 상점 앞 잔디밭에 앉아 우유에 빵 조각을 뜯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동네아이들이 몰려왔다. 아이들 눈빛이 무슨 신기한 동물이라도 바라보는 듯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외국인, 그것도 검게 탄 얼굴에 자전거로 여행하는 동양인을 처음 보는 게 분명하다.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의사소통이 될 리 만무하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자, 한 아이가 뛰어가선 ‘폴란드어-영어’ 사전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이름은’ ‘국적은’ ‘직업은’ 등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브로츠와프를 출발하여 3일째 저녁 늦게 비를 맞으면서 중세 도시 크라쿠프(Krak뾵)에 입성했다. 도시 북쪽에 있는 캠핑장을 물어물어 찾아 도착해보니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다. 빗속에 텐트를 치고는 짐을 옮겼다. 뭔가 먹어야 하는데 만사가 귀찮다. 이틀 밤을 국도 부근에서 야영했기에 씻지도 못했건만,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빗줄기는 여전하다. 텐트 안에서 마지막 남은 중국산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는 옛 시가지를 찾았다. 여전히 무거운 하늘에 빗줄기가 오락가락한다. 중세 도시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진 크라쿠프를 관광하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빗속에서 아우슈비츠를 찾을 심정도 아니기에, 먼저 15년 전의 기억을 찾아 옛 시가지를 돌아보려 나섰다.
크라쿠프 옛 시청사 광장.
울창한 숲 속으로 이어진 국도.
크라쿠프 옛 시청사 광장.
새벽녘까지 내리던 빗줄기가 멈췄다. 최근 유럽에는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나 연중일기를 예측하기 힘들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들은 산업문명에 인류의 미래까지도 쏟아부은 자업자득의 결과다. 그러나 선진문명의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의 경우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희생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예술이 넘치는 크라쿠프 거리.
크라쿠프 서쪽 60km 지점에 있는 오스웨침(Oswiecim, 독일명 아우슈비츠)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교외로 접어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햇살이 녹음의 색상을 한층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같은 버스에 동양인 여행자가 있기에 한국 배낭족인가 했는데 일본인이다. 3년 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단다. 세상을 많이도 돌아본 친구다. 우리들의 화제는 자연히 잔인한 인간의 역사 중 하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맞춰졌다.
아울러 2000년에 걸쳐 추방과 멸시 속에 살아온 유대인들, 그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형성한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무차별 살인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이해하기 힘든 현실 등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유대인과는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도 아무런 악연이 없다. 그저 잔인한 역사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개 철학도에 지나지 않는다.
버스는 1시간 반 만에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용소 정문 앞에 도착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온 수많은 인파로 만원이다. 수용소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5년 전에 찾았을 때의 모습에서 전혀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색이 바랜 철문 위에 반원형으로 ‘노동을 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의미의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고된 삶을 대변하는 듯하여 다시 봐도 가슴이 저려온다. 한여름의 태양을 이고 있는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에 형성된 수십 동의 수용소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희생된 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복도.
무너져내린 아우슈비츠 가스실 앞에 앉은 이스라엘 수학여행단.
돌아오는 길에 아우슈비츠에서 몇km 떨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나치 수용소인 비르케나우(Birkenau)를 돌아보고는 석양이 크라쿠프를 감싸안을 즈음 시내로 돌아왔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앞으로도 얼마간은 더 방황을 해야 할 모양이다. 수도 바르샤바를 향해 출발이다.
유대민족이 펼치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사색은 지난 2000년 필자가 자전거로 중동을 횡단했을 때의 기록인 ‘자전거에 사막을 싣고’ 이스라엘 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