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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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두 번째 왔는데도 ‘범죄의 충격’은 그대로 … 방문객 속엔 이스라엘 학생들도 눈에 띄어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입력2004-09-23 12: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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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와지엔키 공원.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브로츠와프 시내를 벗어나 E40번 국도 위에 올랐다. 대도시의 경우 교통량이 적은 시간대인 새벽녘에 탈출하는 게 좋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는 서유럽에서는 안전사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동유럽의 경우에는 사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체제 전환기에 있는 동유럽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탓에 문화시설의 일종인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 만큼의 여유가 없다.

    흔들리는 핸들을 동남쪽으로 고정시켰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 다시 들르기로 결심을 굳히고 출발했건만. 수도 바르샤바까지 200km 이상을 돌아가는 탓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의 망설임이 자전거 핸들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눈썹 위에 자리할 즈음, 번뇌하는 마음조차 사라졌다. 가고자 하는 길로 접어든 이상, 더 이상의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One way ticket(편도표)!’이다.

    폴란드 어린이들과 사전 찾아가며 손짓발짓 대화

    조그만 상점 하나가 있는 마을 입구에서 일단 멈췄다. 점심을 먹어야 한다.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하고는 싣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음식을 조달한다. 상점 앞 잔디밭에 앉아 우유에 빵 조각을 뜯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동네아이들이 몰려왔다. 아이들 눈빛이 무슨 신기한 동물이라도 바라보는 듯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외국인, 그것도 검게 탄 얼굴에 자전거로 여행하는 동양인을 처음 보는 게 분명하다.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의사소통이 될 리 만무하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자, 한 아이가 뛰어가선 ‘폴란드어-영어’ 사전을 들고 왔다. 그러고는 ‘이름은’ ‘국적은’ ‘직업은’ 등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내 나이를 듣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아이들 부모님 나이를 물어보니 내 나이보다 서너 살씩 적었다. 사전을 찾아가며 2시간가량이나 대화를 나눴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하고 길을 재촉할 만큼 강하질 못하다. 그렇다고 여정 중에 마냥 철부지 소년같이 세월만 보낼 수도 없기에 안녕을 고했다. 그러자 5가 적힌 작은 동전 하나를 건네며 무사 여행을 기원하는 것이다. 나라에 따라 행운의 숫자가 다른데 이곳 폴란드에서는 ‘5’가 그 숫자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마음이 고맙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인연에게조차 행운을 기원해주는 천사 같은 아이들. 이 순수한 만남을 찾아 끝도 없는 여정을 다시 떠난다.



    브로츠와프를 출발하여 3일째 저녁 늦게 비를 맞으면서 중세 도시 크라쿠프(Krak뾵)에 입성했다. 도시 북쪽에 있는 캠핑장을 물어물어 찾아 도착해보니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다. 빗속에 텐트를 치고는 짐을 옮겼다. 뭔가 먹어야 하는데 만사가 귀찮다. 이틀 밤을 국도 부근에서 야영했기에 씻지도 못했건만,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빗줄기는 여전하다. 텐트 안에서 마지막 남은 중국산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는 옛 시가지를 찾았다. 여전히 무거운 하늘에 빗줄기가 오락가락한다. 중세 도시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진 크라쿠프를 관광하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빗속에서 아우슈비츠를 찾을 심정도 아니기에, 먼저 15년 전의 기억을 찾아 옛 시가지를 돌아보려 나섰다.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크라쿠프 옛 시청사 광장.

    많이 단장을 끝낸 풍경이다. 유럽의 여름 휴가철이어서, 특히 옛 시가지에는 썰렁한 날씨와 무관하게 인파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중세 분위기를 한층 더해주는 돌벽돌이 깔린 거리 모퉁이 여기저기에 쪼그리고 앉아 적선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15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본주의적인 풍경이다. 도태된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다. 그러나 약육강식이라는 정글법칙만 자리하는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는 곧 소외로 이어지고 만다. 서글픈 현실이다.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울창한 숲 속으로 이어진 국도.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크라쿠프 옛 시청사 광장.

    폴란드 역사의 원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크라쿠프. 말로폴스카(Malopolska) 왕국의 500년 도읍지로 14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서유럽과 비잔틴, 그리고 남유럽과 발틱해를 잇는 교역의 중계지로서 중세 유럽 최대 도시로 발전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군과 소련군의 폭격을 받지 않아 중세 도시풍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천년 고도이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내리던 빗줄기가 멈췄다. 최근 유럽에는 이상기후 현상이 나타나 연중일기를 예측하기 힘들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들은 산업문명에 인류의 미래까지도 쏟아부은 자업자득의 결과다. 그러나 선진문명의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의 경우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희생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예술이 넘치는 크라쿠프 거리.

    세계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로 아우슈비츠 ‘만원’

    크라쿠프 서쪽 60km 지점에 있는 오스웨침(Oswiecim, 독일명 아우슈비츠)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교외로 접어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햇살이 녹음의 색상을 한층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같은 버스에 동양인 여행자가 있기에 한국 배낭족인가 했는데 일본인이다. 3년 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단다. 세상을 많이도 돌아본 친구다. 우리들의 화제는 자연히 잔인한 인간의 역사 중 하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맞춰졌다.

    아울러 2000년에 걸쳐 추방과 멸시 속에 살아온 유대인들, 그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형성한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무차별 살인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이해하기 힘든 현실 등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유대인과는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도 아무런 악연이 없다. 그저 잔인한 역사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개 철학도에 지나지 않는다.

    버스는 1시간 반 만에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용소 정문 앞에 도착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온 수많은 인파로 만원이다. 수용소 정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5년 전에 찾았을 때의 모습에서 전혀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색이 바랜 철문 위에 반원형으로 ‘노동을 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의미의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고된 삶을 대변하는 듯하여 다시 봐도 가슴이 저려온다. 한여름의 태양을 이고 있는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에 형성된 수십 동의 수용소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희생된 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복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0년에서 44년까지 유대인뿐만 아니라 집시, 신체불구자, 정치범 등 200만명에 가까운 27개 국적의 생명들이 이 살인공장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인간 이하의 처참한 삶을 영위했던 수용소 시설들의 형태가 상당히 남아 있어, 카인의 후예 같은 인간에 의해 얼마만큼 잔인한 죄악이 저질러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남녀 불문하고 하나같이 죄수복 차림에 삭발한 모습으로 희생된 이들의 사진이 수십m나 되는 긴 복도 양쪽에 이중삼중으로 수천 수만을 헤아릴 정도다. 한마디로 영혼의 공동묘지다. 두 번째 찾는 곳이건만, 건물 몇 동에 전시되어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에 현기증을 느껴 밖으로 나와선 계단에 앉았다. 어떤 감각을 가졌기에 이와 같은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을까.

    살인공장 ‘아우슈비츠’를 가다

    무너져내린 아우슈비츠 가스실 앞에 앉은 이스라엘 수학여행단.

    저 멀리 인파 속에 다비드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를 든 그룹이 보인다. 아직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다. 선택된 민족인 자신의 선조들이 희생된 현장에 서 있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역사의 희생양으로 자처하는 유대민족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타민족을 상대로 자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죄악들에 대해 제3자인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역사의 인식’과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질문을 들고 답을 찾아 다시 온 아우슈비츠. 그러나 여전히 숙제를 남기고 돌아선다.

    돌아오는 길에 아우슈비츠에서 몇km 떨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나치 수용소인 비르케나우(Birkenau)를 돌아보고는 석양이 크라쿠프를 감싸안을 즈음 시내로 돌아왔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앞으로도 얼마간은 더 방황을 해야 할 모양이다. 수도 바르샤바를 향해 출발이다.

    유대민족이 펼치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사색은 지난 2000년 필자가 자전거로 중동을 횡단했을 때의 기록인 ‘자전거에 사막을 싣고’ 이스라엘 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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