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아이마을 둥구나무 유치원의 금요산행 수업 모습(위). 천, 털실, 헝겊인형 등 아이마을 둥구나무 유치원의 자연소재 장난감(아래 왼쪽). 나무 위로 올라가는 둥구나무 유치원의 남자 어린이.
미국의 작가 로버트 풀검은 유치원에서 인간의 모든 기본 교육이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란 고민도 커지게 마련. 초·중·고등학교처럼 국가의 통제를 비교적 받지 않는 유아교육 기관들은 저마다 특유의 교육철학과 학습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춘추전국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어린이의 자연스런 발달을 중시하는 육아공동체부터 능력 계발을 중시하는 ‘기능성 유치원’, 100% ‘유기농 식단’을 제공하는 어린이집까지 그 성격도 다양하다. 학부모의 교육관과 개성에 따라 유아교육 기관의 선택폭도 훨씬 넓어진 셈이다.
먼저 눈에 띄는 곳은 자연친화적인 교육프로그램을 내세운 ‘육아공동체’ 개념의 유치원. 10명이 조금 넘는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가 함께 유치원을 만들어간다.
자연친화적 ‘육아공동체’ 실천
“선생님, 저 다 올라왔어요. 킥킥.”
4월16일 금요일 오전 경기 과천시의 매봉산 중턱. 주나경양(6)이 쏜살같이 나무에 매달리더니 금세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경이는 나무 기둥을 꼭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뒤에서 기다리던 최재현군(6)이 “내가 더 높이 올라간다”며 나경이에게 도전할 태세다. 옆의 나무에서는 줄타기 놀이가 한창이다. 유치원 교사가 튼튼한 나뭇가지에 로프를 매달자, 아이들이 차례대로 줄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아” 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마치 타잔을 연상시킨다. 교사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예의주시하면서도, 결코 쉽게 도움의 손길을 내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혼자 힘으로 자연 속에서 뛰놀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까무잡잡하게 그은 어린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퍼졌다.
과천에 자리잡은 ‘아이마을 둥구나무 유치원’(이하 둥구나무 유치원)의 금요산행 수업 풍경이다. 만 4살부터 6살까지 다양한 연령으로 구성된 15명의 어린이들이 유치원 건물을 벗어나, 매주 금요일마다 산에 오른다. 나무타기, 줄타기, 바위 올라타기, 자연 관찰 등은 모두 수업의 일환이다. 아이들은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균형감각을 배운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을 밟고, 나무와 곤충, 꽃들과 대화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어, 소금쟁이가 결혼하나 봐!” “국수나무에서 국수가 쏟아질 거야, 우헤헤.” “우와, 도롱뇽 알 여기에 있어요.” 산에 오르는 중에도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쉴새없이 이어졌다.
둥구나무 유치원은 여러모로 독특한 유아교육 기관이다. 유치원 교사와 학부모의 공동 출자로 운영될 뿐 아니라, 일반 유치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유의 교육법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 독일에서는 보편화된 일종의 육아공동체와 비슷한 형태다. 유치원에는 레고 같은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장난감이 없으며, 연령별로 반이 나눠져 있지도 않다. 이는 독일의 ‘발도르프 교육’을 지향하는 민경진 원장의 철학에서 기인한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아이들의 상상력 발달과 감각 교육을 중시해요. 그래서 상상력을 제한하는 기성 장난감은 되도록 갖고 놀지 않도록 하는 거죠. 연령혼합반은 과거 우리나라의 대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요. 4, 5살 어린이들은 언니, 오빠를 통해 배우고, 6살 어린이들은 동생들을 돌보는 책임감을 갖게 되니까요.”
서울 강남구 청담동 ‘바나나 아일랜드’의 교실(왼쪽). ‘바나나 아일랜드’의 외국인 교사 마이클씨가 어린이들에게 반죽한 밀가루로 수제비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조기교육과 선행학습이 강조되는 시대에 이러한 놀이 중심의 교육이 학부모를 불안하게 하진 않을까. 김재환군(5)의 어머니 오경아씨는 조기교육의 실체를 알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소신을 내비쳤다.
“아이가 남보다 더 뛰어나길 바라는 학부모는 이런 교육방식에 불안과 조바심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학부모에겐 더없이 좋은 교육법이에요. 그 나이에 맞는 교육이란 게 있는 거잖아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뛰노는 것이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일이죠. 사회관계에 적응하는 자신감을 얻는 게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능 계발 영어 유치원 입소문
둥구나무 유치원의 학부모들 역시 유아교육의 반(半)전문가다. 직접 유치원 운영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각 가정을 돌면서 발도로프 교육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아이들의 지나친 TV·비디오 시청을 금하고, 백화점·놀이공원 등 시·청각에 자극을 주는 장소에는 아이들을 자주 데리고 가지 않는 것도 학부모들이 유념하는 대목.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교육법을 논의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 유치원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일반 유치원과 대척점에 선 유아교육 기관은 바로 기능 계발 중심의 유치원이다. 특히 각광받는 것이 영어 유치원.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도록 만들겠다는 학부모들의 의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방식도 가지가지. 그 중에서도 요리를 통해 영어를 가르치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바나나 아일랜드’의 교육방식은 독특하다고 입소문이 났다.
“아 유 레디?(Are you ready?) 후 윌 링 더 벨?(Who’ll ring the bell?)”
“미(me)!” “미(me)!”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을 누가 울리겠냐는 마이클 선생님의 질문에 7명의 어린이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목해달라고 나선다. 쿠킹 타임은 그 어느 수업보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4월14일 오늘의 요리는 수제비. 마이클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오렌지색, 그린색 밀가루 반죽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이 반죽을 조금씩 뜯어가도록 했다. 마이클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어린이를 위해서 한국인 교사가 한국말로 살짝 귀띔을 해준다. 이들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도 절대 주눅 드는 법이 없다. 그저 밀가루를 반죽하고 별, 달 모양으로 수제비를 뜨는 데 온통 신경이 집중돼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수제비가 ‘star-shape(별 모양)’ ‘moon-shape(달 모양)’이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익힌다. 옆 반에서 ‘스토리 텔링’ 수업을 듣던 아이들도 “우린 언제 요리수업을 하냐”며 수업 광경을 흘끔 쳐다봤다.
요리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은 어린이를 위한 파스텔톤의 맞춤형 부엌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키 높이에 맞게 제작된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앙증맞은 작은 그릇과 수저는 아이들의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다. 실제로 바나나 아일랜드의 고급스럽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테리어는 아이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장점이다. ‘지혜의 공간’으로 불리는 부엌의 천장은 비행기 소품과 바다를 상징하는 모자이크 타일로 구성돼 있다. 지하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내려가면, 색색의 유리로 둘러싸인 원통형 동굴과 놀이방을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은 마치 탐험을 하듯 놀이학교 곳곳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요리가 끝나자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이 만든 수제비를 먹어보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년이 넘게 자녀를 이곳에 보내고 있다는 학부모 정모씨(31·여)는 딸을 이곳에 데려다주고, 모니터 화면을 통해 아이가 신나게 영어공부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함을 느낀다고 했다.
“이렇게 깨끗하고 예쁜 환경에서 영어를 즐겁게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아요. 아이를 다른 유치원에도 데려가 봤지만, 이곳에 오기를 고집하더라구요.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그런가 봐요. 다른 유치원에선 책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단어 받아쓰기도 해야 하거든요. 너무 놀이 중심이라 공부를 안 할까 걱정도 되지만요.”
4월16일 서울 성동구 금호동 ‘금봉 어린이집’의 점심시간. 꽃들반의 한 남자 어린이가 친구들에게 반찬인 시금치 나물을 나눠주고 있다.
최근 유아교육·보육기관이 관심을 갖는 또 다른 화두는 ‘건강한 먹거리’다. 성장기의 어린이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음식’인 만큼, 자기 자녀에게 몸에 좋은 유기농 식품을 먹이겠다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것. 회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유기농산물을 공급하는 생태유아공동체의 한 관계자는 “요즘은 학부모들의 권유로 유기농 식품을 공급받는 시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수도권생태유아공동체가 모범기관으로 추천한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금봉 어린이집’은 김치와 장을 교사들이 직접 담가 제공하고 있다. 또 가공식품이나 과자, 빵 등의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아이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게 이곳의 철칙이다.
4월16일 만 6살 어린이들로 구성된 꽃들반의 점심시간. 당번을 맡은 이승은양(6)이 친구들의 식판에 직접 시금치와 김치를 나눠주고 있다. 이날의 메뉴는 쌀밥과 쑥국, 김치와 시금치, 그리고 닭도리탕.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이나 소시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밥 위에 나물을 놓고 쓱싹쓱싹 비벼 입에 넣는 모습이 무척 맛있어 보인다. 이은지양(6)은 “나물이 제일 맛있다”며 식판에 놓인 밥과 반찬을 뚝딱 해치웠다.
아이들이 편식하지 않고 반찬을 잘 먹어 신기하다는 말에 김미정 교사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어린이집을 온 아이들은 좀 힘들어했어요. 미나리를 먹어보곤 ‘이게 뭐예요, 너무 써요’하면서 투덜대기 일쑤였죠. 하지만 한두 달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미나리와 쑥국을 직접 챙겨먹기 시작했어요. 간식으로 제공하는 백설기나 시루떡 같은 한국 전통 음식도 얼마나 잘 먹는지 몰라요.”
아이들의 먹거리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간식으로는 우유 대신 산양유를, 콜라나 사이다 대신 매실음료나 수정과를 아이들에게 먹인다. 어린이집 뒤편에는 배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를 키워 아이들이 직접 과일을 맛볼 수 있도록 했다. 텃밭에는 고추, 상추와 토마토를 심어 언제든 신선한 야채도 먹을 수 있다. 어린이집의 교사로 40년이 넘게 일해온 윤여순 원장(61)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올바른 식습관을 심어주기 위해 유기농 식단을 제공하게 됐다”고 밝혔다. 공원 녹지지대 근처에 자리잡아 훌륭한 환경까지 갖춘 덕택에 금봉 어린이집은 대기자만 300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유아교육 기관의 다양화가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었지만,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화여대의 이기숙 유아교육과 교수는 올바른 유아교육 기관의 선택법을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유아교육 기관이 기능 교육에만 치우쳐 있는 것 아닌지, 담임교사가 80% 이상의 수업을 주관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담임교사가 얼마나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아이의 성장도 차이가 나거든요. 교육프로그램이 아동의 흥미와 욕구를 잘 반영하고 있는지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추상적인 학습보다 구체적 사물 조작과 놀이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