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꾸준히 느는 가운데 특히 올해는 지원자 수가 급증했다.‘따분한 직업’이란 편견과 달리 본인의 노력에 따라 현장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영어완전정복’에 나오는 주인공 이나영의 대사다.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9급 공무원인 주인공은 꿈속에서 고고한 명성황후가 되는데, 직업의식 때문에 입에서는 그만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 영화에서 대한민국 9급 공무원은 왕비의 극적인 삶과 정반대편에 있는 평범하고 흔한 인생의 전형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최근 한 직업 포털사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인의 35%가 이직을 위해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중 3분의 1은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홈쇼핑 상품으로 ‘9급 공무원 시험 강의’가 등장한 것도 당연해 보인다.
대표적 학원촌인 서울 노량진에서만 최소 1만5000여명이 9급과 7급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특히 지금은 5월16일과 6월13일 행정자치부와 서울특별시의 공무원 채용 시험을 앞둔지라 빈자리가 없을 정도고, 수강생들 사이의 신경전도 최고조에 이른 상태. 형법을 가르치는 강사 진용은씨(한교고시학원)는 “이미 수강생의 10%는 직장에서 학원으로 돌아온 ‘U턴 수험생’이며, 주부들도 크게 늘어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학원 수강생인 김모씨(26·여) 역시 대학 졸업 후 대기업 S증권에 공채로 합격해 다니다 “남녀 차별이 있는 데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아 사표를 내고 시험준비를 시작했는데 잘한 결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5월 국가직 시험 경쟁률 76대 1
18세에서 28세 사이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학력·성별·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고, 이 시험을 통과하면 최초로 얻게 되는 직급인 9급 공무원은 크게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뉜다. 국가직은 행정자치부에서, 지방직은 서울특별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뽑는다.
예를 들면 국민들이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주민등록등본 등을 발급받을 때 만나는 공무원이 지방직 9급 공무원이고, 학교 서무실·법원이나 지방노동청 등 정부기관에서 민원 업무 등을 맡은 사람이 대개 국가직 9급 공무원이다. 교도소 교도관도 9급 공무원이고, 국·공립 도서관에서도, 시장 비서실에서도 9급 공무원이 시민을 맞는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관’을 찾을 때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9급 공무원이다.
5월16일 시험을 치르는 국가직 9급의 경우 2121명 채용에 16만1602명이 지원해 76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지난해에 비해 지원자 수가 39%나 늘어 담당자들도 놀랍다는 반응이다. 행정자치부 고시과 정지만 계장은 “서울시내 중·고등학교 대부분을 다 빌려 시험장으로 써야 할 만큼 많이 늘었다. 학력도 높아져 지난해 합격자 1883명 중 95%가 대졸이고, 26명은 대학원졸 이상”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인사기획팀의 윤재갑씨도 “지난해 9급 경쟁률이 150대 1이었다. 일단 합격하면 이직이 없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9급 공무원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인 10명 중 1명이 시험공부를 할 만큼 다른 직업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것일까. 과연 대한민국 9급 공무원들이 명성황후의 권세에 버금간다는 ‘철밥통’과 ‘칼퇴근’의 영화를 누리기 때문일까.
발랄한 옷차림과 미소가 빛나는 김예은씨(26)와 ‘쿨’한 스타일의 이후관씨(28). ‘딱딱한 공무원’에 대한 선입견을 무색하게 하는 이들은 서울 강서구청 가양3동 동사무소의 막내인 9급 공무원이다. 김씨는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2002년 10월 동사무소로 발령났다. 영세민이 많아 혼자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는 120가구와 노인문제를 담당한다.
“분기별로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조사하는 게 제일 큰 일입니다. 거동 불편한 노인들껜 쌀도 갖다 드리고요.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고, 무조건 기초생활수급받게 해달라고 ‘떼쓰는’ 분들이 무지 많아요. 처지가 어려운 걸 뻔히 알아도 정책기관이 아니니까 안타까울 때가 많지요.”
지난해 말 발령을 받아 아직 ‘시보’인 이씨는 대학에서 일어를 전공했지만 “노력한 만큼 평가받고 싶어서” 9급 공무원이 되었다. 현재 그가 맡은 일은 대형폐기물과 음식쓰레기 관리 및 민방위 업무다. 본봉은 60만원밖에 안 되지만 지난달엔 이것저것 모두 합쳐 15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했다.
“대학 동기들 중 회사에서 영업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실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공무원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죠. 특히 동사무소는 직원들이 가족 같고 인간적이죠. 지금은 아주 만족스러워요.”
서울 강서구 가양3동 동사무소에서 새내기 9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김예은씨(위)와 이후관씨. 첫 직장에 만족한다는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생각까지 신세대답다.
한 서울시 공무원은 “공무원 사회에도 1998년부터 작년까지 구조조정이 있었다. 그러나 ‘도태’되는 사람은 있어도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면 ‘잘리진’ 않는다”고 귀띔했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다 아예 시험정보사이트를 운영하게 된 ‘시험아카데미’(www.exam.ac) 이승영 대표는 “20대 초에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30대 후반에 이르면 삼성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나온다. 각종 복지혜택이 좋고 학벌, 배경, 구조조정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전처럼 ‘철밥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테인리스 스틸 밥통’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칼퇴근’은 적어도 9급 공무원들에게는 어림도 없다고들 한다. 동사무소 공무원들은 눈이 오면 ‘제설대기’, 비가 오면 ‘수방대기’를 한다. 지난해 말 발령받은 9급 공무원들은 대개 올 3월 밤새 눈을 쓸며 ‘공무원이 됐다’는 걸 실감했다고 한다. 요즘은 선거업무를 나눠 하느라 담당과 상관없이 매일 야근을 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서울시장이 “밤새 에어컨 틀어주고, 난방해줄 테니 얼마든 일하라”고 독려했다는 서울시 공무원들은 칼퇴근은커녕 요즘 죽을 맛이라고 한다. 9급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 통신회사에 다니다 서울시청으로 발령받은 한 9급 여성공무원은 “12시간 근무는 기본이고 퇴근은 시장, 부시장 일정에 따라 결정된다. 일반 기업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칼퇴근’ 이제 옛말 … 야근 밥 먹듯
또한 공무원 조직 내부에서도 ‘스스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보편화됐다고 한다. 한 서울시 행정공무원은 “매일 밤 11시에 퇴근해 전화로 ‘토킹영어강의’를 듣는다. 전문 계약직들이 점점 늘어나 공무원들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고 털어놓는다.
정부의 각종 프로젝트에 민간 전문인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9급 공무원들도 자신의 노력에 따라 현장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젊은이들에게 공무원직이 어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 시·구청 공무원들이 미술전시회나 출판기념회, 심지어 예술인들의 테크노파티에 참석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현장을 뛰는 젊은 9급 공무원들은 책상에 앉아 형식적인 통계 자료나 만드는 옛날 공무원들과 외모에서부터 마음가짐까지 모두 다르다. 이들은 예술인들과 직접 만나 그들이 원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정부 정책과 실질적으로 연결해 ‘문화행정가’로서 전문성을 갖게 된다.
강사 진용은씨는 “공무원 업무에도 기획력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일이 많다. 이런 분야가 응시 경쟁률도 높다. 전통적으로 수사 업무를 돕는 검찰사무직이나 법원직이 대표적인 경우다. 사회복지도 사명감과 보람을 갖고 일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모든 공무원이 창조적인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와 노동, 환경도 경험을 쌓아 전문적으로 활동하기 좋은 분야로 꼽힌다.
‘철밥통’과 ‘칼퇴근’ 때문이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공무원으로 국민에게 봉사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이처럼 환영할 만한 일도 없을 듯하다.
공기나 물처럼, 대한민국이란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9급 공무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