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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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

佛 정신적 지주 집 없는 이들과 한평생 … 주택난 심화 속 ‘공동체 철학’ 다시 주목

  • 파리=지동혁 통신원 jidh@hotmail.com

    입력2004-02-05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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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

    알포트빌 자택에서 글을 쓰고 있는 아베 피에르 신부.

    수백 가지의 치즈만큼이나 다양한 취향과 개성을 지녔다는 프랑스 사람들. 그래서일까. 그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나폴레옹이나 드골과 같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현존 인물 중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십년간 대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사람이 있다. 바로 ‘집 없는 이들의 대부’로 불리는 아베 피에르 신부다.

    그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여론조사를 통해서 증명된다. 일요판 신문 ‘주르날 뒤 디망슈’와 여론조사기관 IFOP는 1988년 이래 매년 두 번씩 프랑스인들이 선호하는 인물 50인을 선정, 발표해왔다. 이 조사에서 아베 피에르는 줄곧 최상위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무려 17회나 수위를 차지했다. 이 정도면 아베 피에르를 위한 인기투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명예로운 퇴진을 선언했다. 91세에 접어든 나이를 이유로 들어 이제는 젊은 세대에게 영광스런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또 ‘이제부터 사회적 연대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일은 젊은 세대의 몫’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지난해 8월의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그의 이름이 1월11일자 신문을 통해 발표된 올 1월 여론조사 결과부터는 제외됐다. 이 자리는 알제리 이민자 출신으로 프랑스의 축구 대표선수가 된, ‘프랑스 사회 통합의 아이콘’ 지네딘 지단이 물려받았다.

    아베 피에르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50년 전, 1954년 2월이다. 그해 겨울, 프랑스에는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쳐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추위에 동사자들이 속출했다. 특히 많은 빈민들과 거처가 없는 노숙자들의 희생이 컸다. 그중에서도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집 없는 한 여인이 동사한 사건은 아베 피에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밤새 추위에 견디다 못해 유명을 달리한 이 여인의 손에는, 자신이 살던 다락방의 집세를 내지 못해 받은 퇴거명령 서류가 쥐어져 있었다.

    선호 인물 인기투표17회 1위



    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

    ‘베드로 신부님’이란 뜻의 ‘아베 피에르’는 앙리 그루에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아베 피에르는 지금이야말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민들에게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각자의 작은 실천이 소외된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머물 곳 없는 이들에게 작은 거처라도 마련해줄 것을 제안했다. “누구든지 고통에 빠진 분들은 들어와서 먹고 자고 희망을 되찾으십시오. 여기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목소리는 엄숙하고도 장중했다. 빈민 구호에 동참하자는 그의 호소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사람들은 구름떼같이 몰려들어 각자 작은 정성을 모았다. 이때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가난한 이웃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그의 행동에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베 피에르의 본명은 앙리 그루에. 사제라는 뜻의 ‘아베’가 ‘피에르’라는 세례명 앞에 붙은, ‘베드로 신부님’이란 뜻의 ‘아베 피에르’는 이미 그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그는 1912년 프랑스 제2 도시 리옹의 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다섯째인 앙리 그루에는 15세 때 신의 계시를 받고 18세가 되는 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1938년, 26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이후 군복무를 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베 피에르’라는 호칭은 이때부터 쓰였다. 종전과 함께 해군 군목(軍牧)이 된 그는 1945년부터 6년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제로서는 독특한 이력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활동들은 그가 단순히 ‘사랑’뿐만 아니라 ‘정의’와 ‘분배’라는 이념에도 가치를 두었다는 점을 확인케 한다. 그는 훗날 자신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고 고백하면서, 다만 핍박받는 유대인들을 도우면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정치라는 것은 다름 아닌 ‘누구에게서 돈을 얻어 누구에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소외 계층 위한 엠마우스회 창설

    아베 피에르는 1949년 엠마우스회를 창설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전흔이 도처에 남아 있는 프랑스에는 굶주리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 줄 몰랐다. 파리 근교 자신의 거처에서 이들을 받아들이던 아베 피에르는 더 넓은 장소에서 더 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결국 넝마주이들과 건축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이 공동체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얻은 수익을 통해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임시 거처를 직접 만들어주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엠마우스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지명으로, 예수의 두 제자가 예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 희망과 용기를 되찾은 곳으로 묘사된다. 엠마우스 운동의 본질은 그 이름이 갖는 의미에 있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이들이 모여 구호에 수동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활동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도움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고, 이로써 희망과 용기를 되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로 아베 피에르의 공동체 철학이 녹아 있다. 더욱 열린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 엠마우스회는 정치와 종교, 인종, 성별 등 모든 차별적 요소를 초월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다. 이 엠마우스 운동은 전 세계 40여개국으로 전파돼 300여개의 공동체로 성장했다.

    이후 아베 피에르는 소외된 사회계층, 특히 거처할 곳이 없는 이웃들을 위해 앞장서 왔다. 그는 불의와 사회적 불평등, 부조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기로 유명하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들 중에서도 1994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무주택자들과 함께 파리 시내의 빈 건물 한 채를 무단 점거한 사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당시 파리시장이었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 후보로부터 즉각 서민층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공약을 받아냈다.

    2월1일은 1954년 아베 피에르가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호소한 지 50주년이 된 날이다. 그는 이날 파리의 인류박물관에서 다시 한번 전 국민을 상대로 호소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사회는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선 2000년대에 들어서 주택난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최근 영세민을 위한 공영주택 건설이 줄어들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저소득층과 아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젊은 가구들을 중심으로 다시 주택문제가 간과할 수 없는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물론 50년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무주택자들과 노숙자들이 있다. 프랑스 통계청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60만 채의 주택이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시사적인 주택문제와 맞물려 지난 반세기 동안 집 없는 이들과 함께해온 아베 피에르의 삶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게 프랑스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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