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실업자가 50만명을 넘어섰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체 실업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치다. 이런 상황에서 2월을 맞아 새로운 졸업생이 쏟아져나오는 대학가는 지금 심각한 위기감에 싸여 있다. 지난해 졸업한 후 1년간 미취업 상태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서울 소재 명문대 졸업생의 수기를 통해 청년 실업 문제의 심각성을 짚어본다.
2003년 12월31일 밤, 나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다시 눈 뜨면 29살이 되어 있을 것이고, 곧 설날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새해에도 계속 그런 식으로 살 것이냐는 질책 섞인 눈길을 보내겠지. 그런데도 계속 살아야 할까. 아니, 그 시선들을 이기고 살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이렇게 또 한해 백수생활을 견뎌가고 있다.
대졸 미취업자.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다 큰 나이에 부모나 등쳐먹는 못난 놈’을 번듯하게 포장한 말이다. 또는 ‘대학 졸업 후에도 사람 구실 못하는 불쌍하고 한심한 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1년 전 이미 대학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하숙집과 도서관, 입시학원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원서 넣는 곳마다 서류전형서 탈락 또 탈락
1995년 광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공과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내 앞에 이런 암흑이 예정돼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힐 만한 명문대는 아니지만, 최소한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밝힐 정도는 되는 곳이다. 특히 내가 진학한 과는 전통의 명문이다. 대학 생활 내내 놀던 선배들은 학교 간판을 달고 당연한 듯 대기업에 취직했고, 나 역시 졸업 후 유명 회사에 입사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졸업 가운을 입은 채 취업 안내판을 살펴보고 있는 ‘예비’ 청년 실업자들.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내 삶이 꼬이기 시작한 건. 제대 후 돌아온 학교는 이전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3년 사이에 학점 4.0, 토익 800점은 기본인 세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1, 2학년 때만 해도 2점대 학점에 토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선배들이 다 대기업에 입사했다.
좌절은 너무 쉽게 찾아왔다. 학점을 메워야 할 과목이 너무 많다는 것에, 그리고 장기 휴학을 하고 ‘죽어라’ 공부해도 토익 점수 800점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에 나는 좌절하기 시작했다.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 그룹을 짜서 공부했지만, 결국 토익 820점, 학점은 3.0을 조금 넘는 성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청년 실업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취업박람회 현장(위쪽). 방학 중에도 각 대학 도서관은 취업과 고시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가득 찬다.
점점 초조해져 하루 종일 PC방에서 취업 정보만 검색한 날도 있었다. 학교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형, 잘 돼가요?’라고 묻는 후배들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회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취직’ 그 자체에 목이 말랐다.
수도권에 있지만 나름대로 건실한 업체라는 곳에서 마침내 합격통지가 왔을 때의 기분은, 드디어 끝 간 데 없이 막힌 터널에서 탈출한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3류 회사였지만,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졸업 동기들 중에는 취업을 위해 강원도나 경상북도, 전라북도까지 내려간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고향에 있는 회사를 찾아간 것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서울에 보내놓은 자식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보며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나는 그런 식으로 불효하고 싶지 않았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서울의 건실한 업체’라고 소개하면 부모님도 만족하실 듯했다. 지난해 10월의 일이다.
하지만 입사 후 한 달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취업을 위한 취업’이 가져온 결과다. 낮은 연봉이나 열악한 환경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배운 지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공고 졸업생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단순작업이 나의 몫이었다. 어렵진 않았지만, 어떤 성취감도 느낄 수 없었다. 하루하루 도태되고 무력해지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다 그저 그런 사람들뿐,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더 좋은 회사’에 대한 욕심으로 나는 다시 백수생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제자리다.
직장이 없다는 건 돈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참 여러 모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 이제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 첫 인사와 함께 나올 ‘지금은 뭐하니?’라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는 탓이다.
실업 탈출구로 의학전문대학원 선택
학과 사무실에 알아보니 함께 졸업한 70여명 가운데 10명 가량이 ‘놀고 있다’. 나처럼 좀 수준이 떨어지는 직장에 들어갔다가 박차고 나온 이들도 있고, 기술고시나 공사 시험 준비 등을 명목으로 걸어둔 채 내내 취업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끊임없이 원서를 넣지만 단 한 곳에도 합격하지 못한 이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서로 반갑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 졸업하는 후배들 중에도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어차피 너무 늦어버린 취업, 포기하기로 말이다. 장기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후에 백수로 지내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2002년 취업했어야 한다. 지금 이 나이에 중소기업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모님을 더 부끄럽게 만드는 일 아닌가. 2월 졸업하는 젊은 졸업생들과 경쟁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자신도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은 의학전문대학원이다. 올 8월 처음 시행되는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을 사람들은 ‘의학 고시’라고 한다. 하지만 경쟁률이 높다고 해도 괜찮다. 취업 경쟁률은 더 높기 때문이다. 어차피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면, 차라리 더 높은 곳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의사가 되기만 한다면, 지금껏 나를 바라보며 마음 고생했던 부모님, 알게 모르게 얕잡아보며 비웃던 주위 사람들을 한꺼번에 놀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며칠 전, 나는 의학전문대학원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이제는 힘이 난다. 한 반 30명 가운데 상당수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미취업자들, 또는 명예퇴직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는 공부를 내가 왜 못하랴 싶은 기분이다.
자연과학과 언어추론, 공간 지각 등의 학원 수강료만으로 한 달에 100만원이 나가고, 교재비와 생활비는 별도다. 이 비용은 모두 집에서 올려주시는 돈으로 충당한다. 이왕 투자하신 거 조금만 더 보태시라고 말하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사실은 강도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모아 더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노력한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아침, 저녁 하숙집 밥만 먹고, 점심은 편의점에서 간단히 때운다. 영화를 보는 등의 기본적인 취미생활도 이제는 사치다.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하루하루를 쪼개 살고 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다 해도 엄청난 학비가 들 것이고, 그후의 진로도 막막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다른 길이 없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리 시간이 더 걸린다 해도 사회에서 내 일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