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재신임 정국에서 최병렬 대표(오른쪽)와 홍사덕 총무 두 사람의 지나친 ‘스타일리스트’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서도 한나라당의 미숙한 대처를 놓고 특히 말들이 많다. 한나라당 관계자들마저도 “우리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고 평할 정도였다. 대통령의 정치공세에 맥 못 추고 끌려다니는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전략과 리더십의 부재다.
10월14일 오전 9시20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본회의 대표연설을 앞두고 긴급 의원총회(이하 긴급 의총)가 열렸다. 이날 안건은 최대표가 제안한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 정면돌파 방안에 대해 의원들의 견해를 묻는 것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최대표는 “노대통령 재신임시 나는 대표직은 물론 의원직도 사퇴하겠다. 우리 당 의원 모두가 노대통령 재신임시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각오로 재신임 정국에 임하자”고 말했다.
최대표의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의원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 재신임을 묻는데 왜 우리가 사퇴하느냐”며 따졌다. 고함과 아우성으로 한동안 회의장은 떠나갈 듯했다. 단상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는 의원들의 모습은 이곳이 같은 당 의원들이 모인 회의장인지 의심이 들게 할 정도였다. 최대표가 “내 얘기를 좀더 들어보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홍사덕 원내총무가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흥분한 의원들은 좀처럼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날 발언에 나선 의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안상수 의원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안의원은 최대표의 의원직 사퇴도 불사한 ‘정면대결론’의 부당성을 5분 이상 조목조목 지적해 참석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전략과 리더십 부재 고스란히 노출
10월14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고 있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곧 이은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최대표는 결국 자신의 지론인 정면대결론을 꺼내지 않았다. 최대표는 “최도술씨 비리의혹이 밝혀질 경우 대통령 탄핵도 불사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자신의 뜻이 꺾여서인지 연설은 다소 맥이 빠진 듯했다.
긴급 의총이 열린 이날 오전 9시20분부터 대표연설이 끝난 10시40분까지, 1시간여 동안 한나라당은 안으로 곪고 있던 문제를 만천하에 여과 없이 드러냈다. 긴급 의총은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회의 분위기는 참석자들의 입을 통해 밖으로 알려졌고, 한나라당 지도부가 얼마나 무기력한지가 그 후 며칠간 정가의 화제가 되고 말았다. 한 당직자는 “최대표도 그렇고 홍총무도 그렇고 지나친 ‘스타일리스트’다. 모양 좋게 승부하는 것도 좋지만 대다수 의원들의 정서와 크게 다른 결정을 별다른 고민 없이 내놓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10월20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귀국이 정치권에 적지 않은 파란을 몰고 올 전망이다.
당내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리면서 한나라당은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같은 기간 SK그룹으로부터 100억원을 받은 혐의로 최돈웅 의원이 검찰에 불려다니면서 SK비자금 사건에 관한 한 최도술씨의 비리의혹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 노대통령을 대놓고 비난하기도 어려워졌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진퇴양난에 빠져 정치적 활로를 찾지 못하는 사이 노대통령으로부터 “재신임 투표 실시 여부를 APEC회의를 다녀온 뒤 여야 대표들과의 회동에서 정치적으로 풀겠다”는 메시지가 날아들자 한나라당 내부는 오히려 안도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최대표가 겪고 있는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귀국은 그 자체로 한나라당을 강타할 또 다른 태풍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재는 10월20일 둘째 아들 수연씨 결혼식과 부친 1주기 추도식 참석을 위해 돌아왔다. 귀국의 공식적인 이유가 가정사라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이 전 총재가 한국 땅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나라당은 크게 흔들릴 것으로 예상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한나라당은 크게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대표 체제 출범 이후 당을 장악한 신진그룹과, 이 전 총재의 측근으로 지난 대선 때까지 당을 좌지우지한 구주류가 그들이다. 최대표의 국회연설이 있은 직후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만약 노대통령이 국민투표에서 재신임을 받으면 최대표의 퇴진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한나라당의 분열은 필연이다. 최대표를 중심으로 한 세력 대 친(親)이회창·서청원 연합 체제 간에 당권을 놓고 타협할 수 없는 정치투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회창 전 총재 정계복귀설도 강한 압박
이런 미묘한 정국에서, 더군다나 최대표의 리더십 부재가 정면으로 공격받는 상황에서 이 전 총재가 돌아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나라당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가 정계은퇴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래서 한나라당의 내부상황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최대표 체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의외로 빨리 수습될 수도 있다. 보수적인 한나라당 의원들의 성향상 딱히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당의 혼란상태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사람들치고 이 전 총재가 완전히 정계를 떠났다고 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전 총재의 미국생활은 상당히 험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남 정연씨와 함께 사는 숙소에서 이 전 총재가 직접 요리를 하는 등 고달프기 그지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런 이 전 총재의 미국생활을 놓고도 말들이 많다. 한 당직자는 “정계은퇴 선언을 한 이 전 총재가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는 “귀양살이를 방불케 하는 이 전 총재의 미국생활은 결국 언젠가 정계복귀를 염두에 둔 명분 쌓기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진정 정치에 초연하다면 굳이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머물 이유가 없다. 국내에 머물며 초연하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에서 이 전 총재는 국내정치에 여전히 관심을 끊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 소식통은 “얼마 전 이 전 총재는 미국 현지에서 보좌진을 채용한 것으로 안다. 그 보좌진의 역할은 매일 한국의 뉴스를 정리해 이 전 총재에게 보고하는 것인데, 국내 현안에 관심을 끊지 않고 있다는 건 언젠가 정치일선에 복귀하겠다는 의사표시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 전 총재가 언젠가는 정계에 복귀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전 총재와 그 측근들 입장에선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은 이 전 총재의 복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할 만하다.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를 바라는 쪽은 물론, 반대하는 쪽에서도 그의 정계복귀를 기정사실로 보는 이들이 많다. 만약 이 전 총재가 정치일선으로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민주당의 분당사태에 버금가는 정계개편이 한나라당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만만하게 봤던 노대통령의 정치공세에 흔들리고, 한편에서는 이 전 총재의 귀국에 대해 서로 해석을 달리하면서 한나라당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전략과 리더십 부재라는 비판에 시달리는 최대표는 과연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따뜻한 새봄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