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벌레 은벌레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모습.
미륵은 하늘과 땅을 갈라낸 다음 해와 달을 떼어서 별을 만든다.
그때는 해도 둘이요 달도 둘이라달 하나 떼어서 북두칠성 남두육성 만들고 해 하나 떼어서 별을 만들어작은 별은 백성의 운명 별로 마련하고큰 별은 임금과 대신의 별로 마련하고
해와 달이 각각 둘이던 시절, 활로 해와 달 각각 하나씩을 쏘아 떨어뜨려서 태양계의 운행을 바로잡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우주거인 미륵은 해와 달 하나씩을 손으로 떼어냈을 터. 미륵은 떼어낸 해를 백성의 ‘운명의 별’로 삼는다. 운명의 별이란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의 운명을 맡는다는 아홉 별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 노랫말에서는 ‘직성(直星)’이라 했다. 제웅의 별, 흙(土)의 별, 물(水)의 별, 금(金)의 별, 해(日)의 별, 불(火)의 별, 계도(計都)의 별, 달(月)의 별, 나무(木)의 별로 이루어진 아홉 별이 바로 그것이다. 남자는 열 살에 제웅의 별이 들기 시작하여 열아홉 살에 다시 돌아오고, 여자는 열한 살에 나무의 별이 들기 시작한다고 한다. “넌 무엇이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냐?”고 할 때의 직성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때는 ‘타고난 성질이나 성미’를 뜻하는 것이다. 별자리로 운명을 점치는 서양의 점성술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미륵은 떼어낸 달로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만드는데, 이 두 별은 해와 달 다음으로 중요한 별이다. 우리는 이것을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와 달은 낮과 밤, 24절기 같은 천지의 운행과 관련된다. 반면 북두칠성은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육성은 삶을 주관한다. 해와 달,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생각의 중심에 두는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우리 창세가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뱀 꼬리에 사람 모습을 한 달의 신 ‘여와’가 달 그림을 이고 있는 모습. 고구려 고분벽화를 다시 그렸다. 해 그림을 이고 있는, 세 발 까마귀 형상의 해의 신 ‘복희’. 고구려 고분벽화를 다시 그렸다(왼쪽부터).
미륵님 세월에는 생식(生食)을 하여 불에 익히지 않고 생 낱알을 잡수시와미륵님은 섬들이로 잡수시와 말(斗)들이로 잡숫고 이래서는 못 살겠네. 내 이리 세상에 나왔거늘, 물의 근본, 불의 근본을 내어야 쓰겠다.나밖에는 없다! 풀메뚜기 잡아내어 형틀에 올려놓고 정강이를 세 차례 때리고는 여봐라, 풀메뚝아, 물의 근본, 불의 근본을 아느냐? 풀메뚜기 말하기를,밤이면 이슬 받아먹고 낮이면 햇발 받아먹고 사는 짐승이 어찌 알리? 나보다 한 번 더 먼저 본 풀개구리를 불러 물으시오.풀개구리를 잡아다가 정강이를 세 차례 때리시며물의 근본, 불의 근본을 아느냐? 풀개구리 말하기를, 밤이면 이슬 받아먹고 낮이면 햇발 받아먹고 사는 짐승이 어찌 알리?나보다 두 번 세 번 더 먼저 본 새앙쥐를 잡아다 물어보시오.새앙쥐를 잡아다가정강이를 세 차례 때리고는 물의 근본, 불의 근본을 네 아느냐? 새앙쥐의 말이 공을 세우면 나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미륵님 말이 너는 천하의 뒤주를 차지하라 한 즉, 새앙쥐의 말이 금덩산 들어가서, 한쪽은 차돌이요, 한쪽은 시우쇠요, 톡톡 치니 불이 났소. 소하산 들어가니 샘물이 솔솔 나와 물의 근본이라 미륵님, 물과 불 근본을 알아냈다네.
시베리아 일대의 퉁구스, 알타이, 타타르 같은 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는 우리 민족의 신화소와 매우 흡사하다. 돌과 쇠를 부딪쳐서 불꽃을 얻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리얼리티가 강하다. 차돌과 쇠가 부딪쳐서 불이 일어난 것을 처음으로 본 새앙쥐가 인간에게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다.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 있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전했다는 이야기와 달라서 관심을 끌 만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재미가 없었을 게다.
신화적인 이야기의 재미는 오히려 서술 방법에 있다. 물과 불의 근본을 찾는 그 방법이 참으로 고약하기 짝이 없다. 우주거인 미륵은 풀메뚜기, 풀개구리, 새앙쥐를 차례로 잡아다가 형틀에 올려놓고 곤장을 친다. 자기 손톱에 낀 때보다 작은 미물을 잡아다 놓고 위엄을 떠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물과 불의 근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과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엽기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무당의 노래이며 춤이며 말이다. 미륵이 결국 새앙쥐에게 천하의 뒤주를 내맡기고서야 물과 불의 근본을 알아낸다. 곤장을 칠 때의 위엄은 간데없이 ‘재빨리’ 천하의 뒤주를 생쥐에게 내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꼴인가? 새앙쥐는 불의 근본을 차돌과 시우쇠를 부딪쳐서 얻고, 물의 근본은 소하산 깊은 곳의 샘물에서 찾았다고 한다.
구리로 만든 원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별자리만 표시한 아주 간략한 전통 천문도(위). 하늘의 원숭이가 땅에 내려와 인간의 조상이 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물과 불의 근본을 알아낸 미륵은 곧바로 우리 인간을 세상에 내놓았다.
옛날 옛 시절에미륵님이 한짝 손에 은쟁반 들고한짝 손에 금쟁반 들고하늘에 노래부르니하늘에서 벌레 떨어져금쟁반에도 다섯이요은쟁반에도 다섯이라.그 벌레 자라와서금벌레는 사나이 되고은벌레는 계집으로 마련하고금벌레 은벌레 자라와서부부로 마련하여세상 사람이 나왔어라.
금벌레 은벌레가 자라서 인간이 되었다니 참으로 독특한 발상 아닌가? 중국의 여와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유대의 야훼도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고 한다. 토우를 빚듯이 말이다. 물론 우리 신화에도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벌레 은벌레가 자라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진흙을 이겨 인간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제우스가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다 쓸어버리자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등 뒤로 던진 돌이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만주족은 진흙과 돌, 혹은 나무로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는 그냥 만들었는데 남자는 여신의 어깨뼈와 겨드랑이 털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야훼의 신화와 대조적이다. 위의 인간 창조 방법과 우리 창세가의 인간 창조 방법을 비교해보라.
우리 ‘창세가’에서는 신이 단번에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땅에서 자라면서 서로서로 도와가며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공생적’ 진화론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그냥 벌레가 아니라 금벌레 은벌레라고 함으로써 벌레도 인간처럼 생명이 있는 존재이며, 그 가운데서 ‘높고 귀한’ 생명으로부터 인간이 자라났다는 사유를 보여준다.
이것은 절대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이나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해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적자생존’의 전투적인 진화론과 좀 다르다.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에 딱 맞아떨어지는 신화가 있다. ‘수호전’의 손대성, ‘서유기’의 손오공으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원숭이의 원조라 할 만한 기(夔)라는 원숭이 이야기가 ‘산해경’에 나온다. 불사의 약을 훔쳤다는 이유로 족쇄를 찬 채 하늘에서 추방당한 기라는 원숭이가 땅에 내려와서 인간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적자생존의 다윈 진화론과 모티브가 똑같다.
우리 신화 속 진화의 원리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의 화합이라는 현대의 시스템 이론과 더 친숙하다고나 할까? 모든 생물은 하나의 공통된 조상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박테리아의 혼합물이라는 것이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다. 그것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신화보다 금벌레 은벌레에서 자라왔다는 신화와 더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태양계의 운행을 조정하는 우주거인이 구름 베틀로 옷을 해 입고 나서는 모습.
기독교 신화의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냥 보통명사였던 것이다. 신은 진흙을 빚어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아담)’을 만들었다. 물론 영어권으로 넘어오면, ‘아담’(사람)이 특정한 사람(휴먼)의 이름이 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흙 혹은 먼지가 ‘아다마’다. 사람(아담)은 흙(아다마)에서 나와서 먼지(아다마)로 돌아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리라. 재미있는 이름 짓기가 아닌가? ‘하와’는 히브리어 ‘하야(살다)’의 명사형으로 ‘삶 혹은 생명’을 뜻한다. 아담은 자신의 아내에게 ‘하야’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여성을 지배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여성이 일구는 삶의 신비와 죽음을 뛰어넘는 인류의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일깨우고 있다. ‘사람(아담)’과 ‘삶(하와)’이 만나 인류의 조상이 된 것이다.
우리 신화로 돌아가보자.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시다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고도 한다. 어느 날 꿈에 하늘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 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남쪽 산의 붉은 봉황이 날아와서 즐기고, 북쪽 바다의 신령스런 거북이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서쪽 골짜기에서 흰 호랑이가 산모퉁이를 지키며, 동쪽 강에서는 푸른 용이 하늘을 날고,가운데 누런 곰이 있었다. 천해 금악 삼위 태백은 본디 구한에 속한 것이며 9황의 64민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우리의 원시신화가 고대 종교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때, 금벌레 은벌레에서 자라난 우리 신화 속 최초의 인간도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다. ‘한단고기’에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기록이다.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춤과 노래로 인간의 탄생 기원
다시 창세가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창세신 미륵이 인간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금벌레 은벌레를 내려달라고 기원할 때 그는 ‘말’로 기원하거나 ‘손’으로 빚거나 하지 않고 춤추며 노래부른다. ‘하늘에 노래부르니’의 원래 노랫말은 ‘하늘에 축사(祝詞)하니’이다. ‘축사’란 하늘에 알리는 말이라는 뜻이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기원하는 바를 노래부른다는 뜻이다. 자, 양손에 금쟁반 은쟁반을 들고 노래와 춤으로 하늘에 비는 미륵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필자에게는 춤추며 노래부르는 무당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진다. 신단수 아래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단군도 그 위에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