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등대 주변에 곱게 핀 수선화에 날아든 꽃등에(작은사진).백도유람선에서 바라본 하백도의 기암절벽.
남원, 구례를 거쳐 섬진강 하류의 하동포구에 이르니 설익은 봄기운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을씨년스럽지만 섬진강의 봄이 시작되는 매화마을의 매화들은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다.
매화마을인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에 위치한 청매실농원(061-772-4066, www.maesil.co.kr)의 홍쌍리씨는 “올해 2월 말부터 양지 쪽에서 피기 시작한 매화는 3월10일을 전후로 만개했다”고 말했다. 청매실농원을 비롯한 다압면 일대에서 3월8일부터 23일까지(주 행사는 3월15~16일) 열리는 매화축제는 올해로 벌써 7회째를 맞고 있다.
섬진강과 나란히 이어지는 찻길을 따라가다 하동읍 목도리 문도마을의 하동포구공원 선착장에서 섬진강유람선 ‘아라리호’에 올랐다. 흘러간 옛 노래 ‘하동포구’의 가사처럼 ‘물새가 울고 달이 뜨는’ 하동포구의 풍경이 퍽 서정적이다. 물길 양쪽으로는 갈대밭과 대밭, 솔숲이 울창하고, 선미(船尾) 저편으로는 지리산의 준봉들이 우뚝하다.
유람선은 남해고속도로의 섬진강교와 가을철 전어축제가 유명한 광양 망덕포구를 뒤로 하고 여수만에 들어섰다. 뱃길 오른쪽으로 광양제철소, 여천석유화학단지의 중후장대(重厚長大)한 플랜트 설비와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초대형 유조선이 잇따라 나타난다. 반면에 산업시설이 거의 없는 덕택에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비교적 잘 간직한 왼쪽의 남해도는 마치 딴 세상처럼 보인다. 약 2시간 동안 섬진강과 여수만을 질러온 유람선은 여수항 여객선터미널에 정박했다.
쾌속유람선 ‘두리둥실호’를 타고 백도의 비경을 감상하는 관광객들.
이튿날 아침 7시50분에 출항하는 쾌속선 ‘페가서스호’를 타고 거문도로 향했다. 마침 날씨가 쾌청하고 바다도 잔잔해서 섬 여행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약 1시간40분 만에 거문도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쾌속유람선 ‘두리둥실호’에 올라 백도로 향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왕복 4시간 가량 걸리던 백도 유람 코스가 이젠 2시간으로 줄었다.
사실 백도를 보지 못한 거문도여행은 헛것이다. 거문도 절경의 절반 이상이 백도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도를 제대로 보려면 무엇보다 운이 좋아야 한다. 두어 해 전에도 백도유람선을 타기 위해 거문도항에서 이틀 밤낮을 하릴없이 서성거린 적이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에 간신히 유람선은 떴지만, 속이 뒤집힐 정도의 뱃멀미와 잔뜩 찌푸린 날씨로 인해 백도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때의 헛품을 보상받고도 남았다. 잔잔한 바다 위에 우뚝우뚝 치솟은 기암절벽이 쾌청한 봄날 따사로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기분이 상쾌하고 햇살도 좋아서인지, 눈길 닿는 곳곳마다 절경이다.
거문도 서도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거문도등대와 관백정(위).만개한 유채꽃에 둘러싸인 영국군묘지. ‘거문도사건’ 당시 조성된 묘지로 원래는 9기였으나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게다가 15년째 백도유람선의 가이드를 맡고 있다는 황해연씨(60)의 자세한 안내와 구성진 음성에 귀기울이다 보면 약 1시간의 백도 해상 일주 코스가 실제보다 훨씬 더 짧게 느껴진다.
백도 못지않은 절경이 또 있다. 거문도 세 섬 중 하나인 서도의 수월봉 자락에 형성된 동백숲길과 거문도등대가 그것이다. 1.6km 가량 이어지는 이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울창한 동백꽃길이다. 사방팔방이 온통 동백꽃이고, 마치 긴 터널을 이룬 듯한 숲길 바닥에는 통째로 낙화한 동백꽃이 낙엽처럼 수북하다.
동백숲길을 빠져나오면 1905년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혔다는 거문도등대에 이른다.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안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쾌청한 날에는 멀리 백도까지 보이는 등대다. 등대 바로 옆에 세워진 관백정(觀白亭)이라는 정자의 이름도 ‘백도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때마침 등대의 관사 아래에 곱게 핀 ‘금잔옥대(金盞玉臺·수선화)’가 봄날의 흥취를 한껏 돋운다.
발걸음을 옮겨 고도(古島) 영국군묘지를 찾았다. 마을 고샅길을 빠져나와 바다가 보이는 오솔길에 들어서자 길가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 동백꽃, 수선화가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봄꽃의 경연장에 들어선 듯하고, 꽃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2박3일의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니 그러잖아도 삭막한 도시의 빛깔이 더욱 칙칙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미 깊고도 짙은 봄빛에 젖은 거문도에서의 짧은 추억이 일장춘몽인 듯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