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은 샛별중 교장은 건장한 체구에 솔직·활발한 성격으로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당장 교육계의 반응이 “시골 소규모 학교 교장이 교육 전반을 관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쪽이어서 최종 낙점을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당선자가 꺼내든 이 깜짝카드가 표류하는 한국교육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조커’일 수도 있지 않은가. 2월12일 거창에서 만난 두 교장은 교직생활 30년 관록과 뚝심, 혜안을 겸비한 녹록지 않은 교육자였다.
샛별중 교장실은 두 대의 유선전화와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려댔다. 언론에서 전교장을 유력한 교육부총리 후보로 소개하자 지인들이 저마다 확인전화를 걸어왔다. 전교장은 “12대 1의 가능성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1월19일 노당선자가 전교장을 찾아 2시간 반 동안 학교현장과 교육문제에 대해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이때 전교장이 거창고 설립자인 고 전영창 선생의 아들이며, 80년대 이후 이미 노당선자와 몇 차례 만났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두 교장은 고교 동기로 막역한 사이
도재원 거창고 교장은 전성은 교장과 거창고 동기로 40여년 우정을 쌓으며 오늘의 거창고를 만들었다.
서울대 농경제학과, 계명대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부터 모교인 거창고에서 교편을 잡은 전교장은 76년에 전영창 교장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서른둘의 나이에 교장에 취임했다. 도재원 교장은 전교장보다 한 살 위지만 거창고 8회 동기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다. 전교장이 서울대로, 도교장이 연세대(화공학과)로 진학하면서 한집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설립 초창기 벽지 학교에 부임하려는 교사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거창고는 졸업생들에게 “모교로 돌아오라”고 간곡히 호소했고, 도교장은 다시 고려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해 교사가 됐다.
3학년만 앉을 수 있어 ‘노인정’이라 불리는 쉼터에 2학년생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왼쪽). 거창고 풍물패 ‘너울막 동아리’.
1980년대는 교육이 정치와 대립해야 하는 험난한 시기였다. 이때 윤영규·이수호(이상 전 전교조 위원장), 유상덕(한국교육연구소장), 이창식(이미경 의원 남편) 등과 YMCA 중등교사협의회에서 교육운동을 하던 전교장은 노당선자뿐 아니라 재야운동가들과 두루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거창고가 본격적으로 전국에 알려진 것은 도교장이 부임한 90년대였다. 당시 입시 위주 교육이 아닌 전인교육을 펼치면서도 높은 대학 진학률을 보인 거창고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95년 2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농정개혁회의’에 각부 장관과 농어촌을 대표한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이 한 시골 고등학교 교장에게 관심을 보이며 “거창고가 한국을 대표할 만한 학교가 되었는데 도재원 교장, 애로점을 말씀하세요”라고 한 내용이 방송 뉴스를 타면서 거창고에 쏟아지는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도교장은 문민정부 시절 2기 교육개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후 외지인의 학교 방문이 줄을 이었습니다. 평균 사흘에 두 팀꼴이더군요. 하루에 세 팀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도 했죠. 백이면 백, 첫 질문은 ‘이 학교가 다른 학교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였어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다른 점은 없다. 우리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할 뿐이다. 학교는 명실상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식목일이라면 식목일답게, 학생의 날은 말 그대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날로 만들어주는 게 명실상부한 교육입니다. 그런데 다 듣고 나서는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건이 안 됩니다’라고 말할 때 허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교장과 교사가 함께 방문할 경우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는 모습도 자주 보았지요.”
교사들은 입각에 대해 찬반 엇갈려
도교장은 “내 이름이 어떻게 부총리 후보에 올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대신 어떤 사람이 교육부 장관이 돼야 하는지 설명했다. “평생 교육자로 보내며 이것만은 개혁돼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 개혁의 의지가 뚜렷해서 엄청난 저항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투명해야 죠. 마지막으로 획일화에 익숙해진 우리 교육에 다양성과 자율성을 심어줄 사람입니다.”
꼼꼼하고 차분한 편인 도교장에 비해 전교장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 전교장은 “내가 저지르면 도교장이 수습했다”고 말한다. 전교장은 자신이 부총리 물망에 오르자 교직원과 가족들에게 드러내놓고 의견을 구했다. 먼저 부인은 펄쩍 뛰며 “그런 제의가 있다면 단호하게 거절해서 장관 자리보다 교직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반대했다. 교사들도 찬성과 반대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했는데 도교장의 뉘앙스는 조금 달랐다. “끝까지 교육자로서 남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학교를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나 60이 되도록 이 학교를 위해 일했으니 나라 개혁을 위해 일하는 것도 ‘거고 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창고는 몇 년째 경남교육청과 자율학교 지정을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전교장이 교육부 수장이 된다면 이 문제는 ‘물 건너가는 일’이라고 여긴다. 두 교장을 잠깐이라도 겪어봤다면 지위를 앞세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를 위해서는 그 자리에 가지 않는 게 옳다고 말한다. 또 전교장의 괄괄한 성격을 잘 아는 이들은 칭찬보다 욕먹을 일이 많을 그 자리에 등 떠밀어 권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교사들 가운데에는 “조광조가 되더라도 교육을 위해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이도 많았다. 남들 보기에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인지 몰라도 이런 사안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큼 학교 분위기는 자유분방했다.
출세 지양(?) 校風 탓 유명인사 적어
또 두 교장이 세상 돌아가는 일과 담쌓은 촌로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선 교사, 교장, 학부모, 심지어 교육행정의 문제점까지 두루 꿰고 있었다. 전교장에게 노당선자와 만났을 때 역설한 교육문제의 해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교사들은 교육부가, 교육부는 교육현장이 바뀌지 않는다며 서로를 개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게 문제”라고 했단다. 또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학교에 대해 학부모나 교사단체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고 전하자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시설이 교육의 하드웨어라면 평준화냐 비평준화냐, 모의고사를 몇 번 치르느냐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교육주체들의 마인드웨어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지요. 자꾸 제도 탓을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지금까지 우리에게 명문학교는 명문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학교, 정·재계 요직에 졸업생들이 두루 포진해 있는 그런 학교다. 그러나 50년 전통의 거창고 졸업생 중 유명인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두 교장은 고개를 갸웃한다. 졸업생들 중 상당수가 교육자의 길을 택했고 기독교계 학교인 만큼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의료 선교를 위해 의대에 진학하는 경우는 있어도, 법대 진학생이 드문 것이 거창고의 전통. 굳이 재계인사를 꼽자면 7회 졸업생인 포스코의 유상부 회장이 있다. 13회 졸업생인 대한항공 전성우 상무는 “돌아가신 전영창 선생님이 ‘돈 많이 벌고 명망을 얻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이 성공’이라 한 말씀을 늘 간직한다”면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재활복지대학 김형식 초대학장은 거창고 11회 졸업생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됐고 폭격으로 한쪽 팔마저 잃은 장애인. 그런 그가 집념 하나로 대학에 가고 유학까지 다녀와 한국재활복지대학 학장이 됐다. 거창고가 낳은 가장 성공한 사람이 바로 김학장 같은 이다. 김학장은 모교의 선배이자 교장이 교육부총리 후보가 됐다는 말에 “오래 살면 좋은 일도 있다는 말이 맞다”며 웃는다. “두 분 모두 평생을 고생하면서도 정의롭게 살아왔고 그만큼 단련이 된 분들이죠. 행정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행정이란 문제 해결 능력 아닙니까.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려내는 일은 정의감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거창고의 ‘직업10계’에는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 남들이 떠받드는 교육부총리라는 자리가 왕관이 아님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