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이후 전국적으로 주택 복구가 시작됐으나 골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건축업자가 공사를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수해로 인한 모래 부족 현상 때문이었다. 양양지역은 태풍 루사로 인해 모래 채취장 자체가 떠내려간 데다, 유일한 레미콘 업체까지 완전히 파괴돼 레미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모래 공급이 중단된 두 달 사이 레미콘 가격이 무려 2배 가까이 뛰어올랐을 정도. 양양군과 강원도는 뒤늦게 모래 확보와 레미콘 업체의 협조를 구했지만 수해복구 지역의 모래 수급 상황은 ‘대란(大亂)’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최악이다.
2002년 상반기 이후 계속된 골재 부족 현상이 수해 복구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오고 있다.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에 따르면 2002년 1~9월 전국에 공급되기로 계획돼 있던 1억6634만 루베(㎥) 중 실제 공급된 골재는 8743만 루베로, 절반에 그쳤다. 1~6월까지는 그럭저럭 계획량을 채웠으나 7월과 8월 두 차례의 집중호우와 태풍 루사 이후에는 공급이 거의 전무한 실정.
모래 부족 현상은 곧바로 수해 복구 현장의 ‘피’와도 같은 레미콘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수해 이후 레미콘 가격은 평균 40% 이상 인상됐다. 지역별로 강원도와 경남 일부 지역의 경우처럼 2배 가까이 오른 지역도 있다. 모래 부족에 따른 레미콘 수급 차질은 수해 복구 차질을 가져와 전국적으로 주택 복구율은 수해 이후 넉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당초 2002년 연내로 주택 피해 복구를 마치겠다던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는 주택 완전 복구를 2003년 상반기로 미룬 상태다. 게다가 수해 피해가 가장 컸던 강원지역과 경남지역은 주택 복구율이 전국 통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강원지역의 경우 주택 복구율은 40% 미만으로, 이마저도 신축 주택의 경우(완파된 주택)는 복구율이 10% 선을 밑돌고 있다. 경남지역은 상황이더욱 심각하다. 이 지역 주요 모래 채취원인 전남 신안군과 진도군의 모래 채취 거부로 극도의 모래 부족 현상을 빚어 주택 완전복구율이 34%에 그치고 있는 상태.
수해 이후 레미콘 평균 40% 인상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 당국은 대책 마련을 외면하고 있다. 골재 부족의 심각성조차 무시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행자부 재해복구과 관계자는 “주택 복구의 경우, 개인마다 사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골재 부족이 복구 부진의 한 요인은 될 수 있어도 딱히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해 정부 당국의 인식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수해 피해 지역 주민들의 얘기는 다르다. 2002년 수해로 사상 최악의 피해를 본 경남 김해시 한림면 일대 주민 133가구는 레미콘 가격 인상으로 아예 주택 신축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집 근처에서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철용씨(43)는 “수재 이후 2002년 11월까지 석 달간은 레미콘 자체를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일반 민간공사가 줄어든 12월 이후에는 레미콘 업체의 담합으로 가격이 폭등해 집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로 전파된 가옥들. 골재대란이 레미콘 가격의 폭등을 불러 수해복구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골재 대란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한국골재협회 관계자는 “수해에 모래가 바다로 쓸려 내려간 것도 한 원인이지만 자원과 환경을 보존하자는 지자체와 환경단체의 바닷모래 골재 채취 규제가 골재대란의 가장 큰 이유”라고 밝혔다. 실제 수해로 인해 골재 부족 현상이 심화되던 2002년 10월, 경남과 울산, 부산, 제주, 전라도 등 국내 남부지역 바닷모래 공급원이었던 전남 신안·진도·해남군이 해당 지역에서 모래 채취 허가를 무기한 반려하는 사태가 있었다. 해당 지자체 입장은 “지역민의 반발과 환경보전 차원에서 내려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것.
그 이후 수해복구 공사를 비롯, 무안국제공항 공사와 국도공사 등 각종 공사가 모래 부족 때문에 중단되는 등 남부지역 골재 수급 상황이 최악에 이르자 골재업자들은 이들 지자체의 골재 채취 허가 취소에 대한 행정심판을 전라남도에 신청하기도 했다. 특히 자체 육상 모래 생산이 전무한 제주도의 경우는 지자체가 직접 나서 행정심판을 신청했다. 제주도청 재해계 관계자는 “9월까지 골재 채취 허가를 내주겠다고 공문까지 주고받았는데 10월이 돼서 이들 지자체가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며 “이는 같은 지자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수해복구뿐만 아니라 국제자유도시 건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골재 수요가 많은 제주도로서는 앞으로 골재 수요를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체선 중국산 모래 수입에 나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건교부가 직접 나섰다. 당장 골재 부족 사태로 공사 중단 사태가 속출한 제주도와 부산, 경남지역에 충남 태안군 앞바다의 골재 채취권을 준 것. 이 때문에 운송비가 4배로 올라 이들 지역의 골재 값은 약 20%나 인상됐다.
건교부 건설기재과 관계자는 “골재의 보존량은 충분한데 골재 채취와 관련한 법령이 4개에 이르는 등 규제 조항이 지나치게 많은 데다 지자체가 환경단체나 지역민들의 눈치를 보다 이런 사태에 이르렀다”며 “골재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 11월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모래를 퍼올릴 수 있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현재 국내 골재 수급은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 법이 시행되면 각 지자체들도 재정적 압박을 받게 돼 골재 채취 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골재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국내에서는 최초로 2002년 12월13일 서울 지역 골재 회사인 길도건업이 중국산 모래 2000t을 수입해 부산 지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 마석환 기획부장은 “국산 모래보다 가격이 10% 더 비싸지만 언제 모래 공급이 중단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다른 골재 회사들도 너도나도 중국산 모래 수입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제주도와 전남, 광주시의 경우도 올해 골재 수급 상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중국산 모래 수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수해복구가 우선인가, 아니면 환경 보존이 더 시급한가.” 영하의 ‘칼바람’을 견디며 컨테이너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수재민들은 수해에 울고, 골재대란에 두 번 울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