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피아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치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다.
그동안 숱하게 쏟아져 나온 ‘나치 치하의 유대인 이야기’의 재탕이 아닐까 하고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리스트’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작품을 통해 절정의 감동을 체험한 뒤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들을 감추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 1911년 폴란드 소스노비에츠에서 태어난 그는 베를린 음악아카데미 등에서 수업을 받았고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던, 쇼팽 전문 천재 피아니스트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그는 수도 바르샤바의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유대인 탄압책으로 유대인 거주지역(게토·Ghetto)으로 강제 이주된 슈필만은 독일군의 잔혹한 통치하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 처형장으로 가는 기차에 실리기 직전 자신을 알아본 유대계 독일 고용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때부터 6년간 그는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굶주림과 다가올 죽음의 공포로 피폐한 삶을 힘겹게 이어나간다.
지독한 고통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두 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포성과 독일군의 학살 속에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피아노 선율은 끊이지 않고 변주된다. 물방울에 비친 맑은 햇살 같은 청량한 느낌을 주는 쇼팽의 녹턴이나 발라드 같은 곡들.
그래선지 이 영화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원제·운명 없음)’을 연상케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15세 소년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의 고통스러운 삶을 겪고도 “그 안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이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작품이다.
피아니스트에게 행복한 순간이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두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고, 슈필만에게 연주나 하고 있을 한가함이란 없었다. 행복의 도구가 거세된 상황. 더 이상의 희망은 없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영화 ‘피아니스트’는 기묘한 방식으로 희망을 전파한다.
도망다니던 슈필만은 바르샤바의 옛 동료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피아노를 발견하고 웃음을 머금는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피아노인가. 그러나 그 은신처 근처에는 독일군이 점령한 옛 폴란드 경찰서가 있다. 숨소리조차 죽여야 할 상황에 피아노 소리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슈필만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손가락을 모은 다음 격렬한 터치를 시작한다. 실제로 건반을 두드리는 건 아니다. 그는 건반을 두드리는 시늉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움의 손길도 끊기고 이제 그는 폐허 위에 완전히 혼자가 됐다. 어느 폐건물의 다락방에서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에 싸여 지내던 슈필만은 순찰중인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독일 장교가 그에게 신분을 묻자 그는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거지 차림의 이 유대인 부랑아가 피아니스트라고 하자 호기심이 발동한 장교는 그를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연주해보라고 한다.
추위와 허기로 딱딱하게 굳은 손, 오랜 도피 생활로 그는 이미 연주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게 아닐까.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 그는 싸늘한 손을 한번 감싸쥐고는 손끝에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폐허가 된 도시의 밤 하늘로 멀리 울려 퍼지는 선율(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실제로는 피아니스트 자누스 올레니작이 연주했다)은 전쟁도 잠시 잊게 할 만하다. 오직 완전한 음악의 세계만 있다. 독일 장교는 슈필만의 연주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보물’을 숨겨주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감정의 과잉을 배제하고 나치의 광기와 인간애, 예술혼 등을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런 객관성이 더 큰 울림을 자아낸다.
개봉: 1월1일/ 상영 시간: 148분/ 관람등급: 12세 이상
그동안 숱하게 쏟아져 나온 ‘나치 치하의 유대인 이야기’의 재탕이 아닐까 하고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리스트’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작품을 통해 절정의 감동을 체험한 뒤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들을 감추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 1911년 폴란드 소스노비에츠에서 태어난 그는 베를린 음악아카데미 등에서 수업을 받았고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던, 쇼팽 전문 천재 피아니스트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그는 수도 바르샤바의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유대인 탄압책으로 유대인 거주지역(게토·Ghetto)으로 강제 이주된 슈필만은 독일군의 잔혹한 통치하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 처형장으로 가는 기차에 실리기 직전 자신을 알아본 유대계 독일 고용인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때부터 6년간 그는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굶주림과 다가올 죽음의 공포로 피폐한 삶을 힘겹게 이어나간다.
지독한 고통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두 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포성과 독일군의 학살 속에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피아노 선율은 끊이지 않고 변주된다. 물방울에 비친 맑은 햇살 같은 청량한 느낌을 주는 쇼팽의 녹턴이나 발라드 같은 곡들.
그래선지 이 영화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원제·운명 없음)’을 연상케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15세 소년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의 고통스러운 삶을 겪고도 “그 안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이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작품이다.
피아니스트에게 행복한 순간이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두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고, 슈필만에게 연주나 하고 있을 한가함이란 없었다. 행복의 도구가 거세된 상황. 더 이상의 희망은 없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영화 ‘피아니스트’는 기묘한 방식으로 희망을 전파한다.
도망다니던 슈필만은 바르샤바의 옛 동료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피아노를 발견하고 웃음을 머금는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피아노인가. 그러나 그 은신처 근처에는 독일군이 점령한 옛 폴란드 경찰서가 있다. 숨소리조차 죽여야 할 상황에 피아노 소리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슈필만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손가락을 모은 다음 격렬한 터치를 시작한다. 실제로 건반을 두드리는 건 아니다. 그는 건반을 두드리는 시늉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도움의 손길도 끊기고 이제 그는 폐허 위에 완전히 혼자가 됐다. 어느 폐건물의 다락방에서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에 싸여 지내던 슈필만은 순찰중인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독일 장교가 그에게 신분을 묻자 그는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거지 차림의 이 유대인 부랑아가 피아니스트라고 하자 호기심이 발동한 장교는 그를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연주해보라고 한다.
추위와 허기로 딱딱하게 굳은 손, 오랜 도피 생활로 그는 이미 연주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게 아닐까.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 그는 싸늘한 손을 한번 감싸쥐고는 손끝에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폐허가 된 도시의 밤 하늘로 멀리 울려 퍼지는 선율(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실제로는 피아니스트 자누스 올레니작이 연주했다)은 전쟁도 잠시 잊게 할 만하다. 오직 완전한 음악의 세계만 있다. 독일 장교는 슈필만의 연주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보물’을 숨겨주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감정의 과잉을 배제하고 나치의 광기와 인간애, 예술혼 등을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런 객관성이 더 큰 울림을 자아낸다.
개봉: 1월1일/ 상영 시간: 148분/ 관람등급: 12세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