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의 별자리를 연구하는 역사천문학회 회원들. 왼쪽부터 김대성, 유승엽, 김세환, 노중평, 이승평, 한은희씨.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의 저자이자 ‘한배달 역사천문학회’ 부회장 노중평씨의 말이다. 그는 선조들이 별에 부여한 신화나 상징성을 잘 해석하면 태고 의 우리 역사까지도 유추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북두칠성을 화두 삼아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아내려는 모임인 역사천문학회가 창설된 것도 바로 그런 목적에서다.
일본 고유 축제로 둔갑 세계에 소개
이 모임이 결성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가 일제 36년의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잃어버린 칠성 신앙을 오히려 일본이 계승해 최근 해외로 문화수출까지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세환 역사천문학회장의 말.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음력 칠월칠석 날 부녀자들이 내당의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7월에 수확하는 가지와 오이와 호박 등을 제상에 차려 칠석제를 지내는 전통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이런 칠석제는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그중 센다이(仙台) 지역의 다나바타 마쓰리가 가장 유명합니다. 칠월칠석 전날 밤 자신의 희망이나 소망을 종이에 써 대나무에 매단 뒤 북두칠성에 기원하는 행사지요. 그런데 이 축제가 브라질의 상파울로시에 소개된 후, 지금은 아예 ‘센다이 축제’라는 고유 명칭으로 상파울로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매년 축제가 거행되고 있어요. 일본의 문화를 대표하는 고유한 축제로 말이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칠성 신앙이 일본의 고유 축제로 둔갑해 세계에 소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역사천문학회 사람들은 매년 칠월칠석이면 우리 전통의 의식을 복원, 칠석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도 음력 7월7일(양력 8월15일) 자시에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백석동천(청와대가 있는 북악산 뒷줄기)에서 회원 10여명이 모인 가운데 칠석제를 개최했다. 제관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 점, 제사를 지낼 때 술이 아닌 차를 올리는 점도 칠석제의 특성. 차(茶) 칼럼니스트이자 역사천문학회 회원인 김대성씨의 말.
“칠월칠석 날 은하수의 물은 예로부터 차꾼들에게는 ‘천일수(天一水)’로 불릴 만큼 최고의 찻물이었지요. 고려 때 차승(茶僧)으로 유명한 진각국사(1178∼1234)는 ‘…북두칠성 국자로 은하수를 길어 달이는 한밤의 차, 차 연기는 싸늘하게 계수나무를 감싸네(斗酌星河煮夜茶 茶煙冷鎖月中桂)’라고 노래했습니다. 진각국사뿐 아니라 옛 차인들은 은하수에 흐르는 물을 이상적인 찻물로 여겼지요.”
칠월칠석은 흔히 은하수 때문에 만나지 못하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주는 오작교를 건너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날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두칠성과는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걸까. 김대성씨는 “칠월칠석의 밤은 단순히 견우와 직녀만 만나는 게 아니라,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우리 민족의 별인 북두칠성의 일곱 별과 남두육성의 여섯 별도 1년에 한 번 서로 만나는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날 밤에는 국자별 4개가 포개듯 서로 마주보고(북두칠성과 남두칠성), 견우와 직녀가 만나 운우의 정을 나누는 것을 축복해준다는 것.
북두칠성의 정기가 가장 강력하게 내려온다는 북악산의 뒷자락에 위치한 ‘백석동천’에는 7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칠성바위가 있다. 회원들이 칠성바위에 서 있는 모습.
이 같은 칠성 신앙의 기원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까. 최근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라는 저서에서 우리 민족과 북두칠성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최근 북한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인위적으로 별자리를 새긴 것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평남 증산군 용덕리 고인돌(BC 30세기경), 평남 평원군 원화리 고인돌(BC 25세기경), 함남 함주군 지석리 고인돌(BC 15세기경) 등에서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남한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아득이 마을 고인돌(대청댐 수몰지역), 함안 동촌리 고인들 등에서 북두칠성과 주변의 별을 새긴 돌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북두칠성에 대해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멋진 만남의 날’ 신풍속 수출할 터
그러다가 별자리 이름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의 경우 돌로 무덤의 방을 만들었던 고분의 벽이나 천장에 그려진 벽화에는 별 그림이 유난히 많다. 예를 들어 서기 408년에 지어진 덕흥리 고분(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소재)의 경우 북두칠성과 여러 별들이 그려져 있고, 5세기 중엽의 고분인 장천1호분(중국 집안시 소재)에는 북두칠성을 뜻하는 ‘북두칠청(北斗七靑)’이란 한자도 씌어져 있다. 백제의 경우 백제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하남시 교산동 토성에는 바위 7개를 약 30여m 간격으로 배치한 ‘칠성바위’가 최근 발견됐다.
비단 유적뿐만 아니다. 노중평씨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인물 중에는 칠성별의 기운을 띠고 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고 말한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은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나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삼국유사)고 하고, 고려의 강감찬 장군은 북두칠성의 한 별인 문곡성이 떨어진 낙성대에서 태어났다 한다. 이외에도 정몽주, 안중근 등도 모두 북두칠성과 ‘인연’을 맺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인들만 북두칠성의 정기를 독차지한 것은 아니다. 고대 동북아시아에서는 ‘별 제사’를 초제(醮祭)라고 했는데, 결혼식 역시 초례(醮禮)라고 불렀다. 원래 초례는 신부가 해가 지기 전 신랑의 집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별이 뜰 무렵에 칠성님에게 먼저 인사 드리는 예법이었다 한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도 ‘너도 하늘의 별이고, 나도 하늘의 별’이라는 인식이 있음을 뜻한다.
아무튼 한국인의 길흉화복과 생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의 의미를 되살려 21세기 우리 민족의 축제로 만들려는 것이‘북두칠성을 찾는 사람들’인 역사천문학회 회원들의 꿈(cafe.daum.net/
oldhistory).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 데이니 하는 국적 불명의 신풍속 대신 우리의 멋진 만남의 날인 칠석 축제를 되살려 전 세계로 퍼뜨린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