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가자지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는 달리 무거운 분위기다. 20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경제 사정은 엉망이다. 이스라엘군은 110만 가자 주민들의 지역 내 이동조차 막고 있다. 그래서 가자지구 남쪽에서 가자 시내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학교 출석률이 형편없다.
가뜩이나 가난에 지친 가자 사람들은 조만간 이스라엘군의 침공이 있을 것으로 보고 긴장하는 모습이다. 실업과 경제난으로 얄팍해진 지갑을 털어 식량과 물, 생활필수품을 사재기하고 있다. 자발리야 난민수용소 등에 포진한 저항세력들은 비선(秘線)조직들을 점검하면서 이스라엘군의 침공에 대비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가자 시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저항, 그리고 희망 없는 내일과 이스라엘군의 전면 침공에 대한 불안이다. 가자지구는 360km2의 좁은 면적에 110만명이 거주하는 인구밀집 지역이다. 유대인 정착민 3000여명이 가자지구의 노른자위 땅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고,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시를 중심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자지구에는 유대인 정착민 6000명을 보호하기 위해 약 2만명에 이르는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지중해를 따라 난 좁은 회랑에 갇혀 지낸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가자를 벗어날 수 없고 서안지구로의 이동도 봉쇄돼 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를 정확히 3등분해 길목마다 검문소를 세워놓고 주민들의 이동을 막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불도저에 집을 잃은 난민 가족들이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취재하기 위해 아침 일찍 가자시를 출발했다. 가자시 남쪽의 지중해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30분 남짓 달리자 거대한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줄잡아 1000대 가량의 차량이 멈춰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맨 앞쪽으로 가보았다. 한 택시운전사에게 “언제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어제 밤 8시에 이곳에 닿아 차안에서 밤을 새웠다. 이전에는 30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다”고 대답했다. 운전석 뒷자리에는 샤리를 쓴 젊은 여인 2명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가자 시내에 있는 이슬람대학에 재학중인 여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이스라엘군이 보안을 구실로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수시로 길을 막고 있어 이렇게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약 100m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군의 검문소가 보였다. 필자는 걸어서라도 그곳을 통과할 요량으로 이스라엘 검문소 쪽으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초소 안에 있던 이스라엘 군인이 필자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내면서 “당신이 취재기자든 뭐든 우린 상관이 없다. 상부의 지시 없이는 아무도 이곳을 지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한 병사는 “아라파트가 와도 못 지나간다”며 낄낄거렸다.
다시 팔레스타인 차량 행렬로 돌아오자, 필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 팔레스타인 젊은이가 “저들이 총을 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당신은 오늘 운이 좋은 것 같다. 내가 갔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의 무분별한 사격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는 얘기였다.
가자지구 엘 부레이 난민수용소 부근에선 길 가던 모녀(40대 초반의 여성과 12세 소녀)가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 모녀처럼 이스라엘군의 마구잡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엘 부레이 난민수용소에서의 장례식은 너무나 조촐했다. 유족들은 상복을 입지도 않았고, 조화(弔花)도 없었다. 유족들이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겐 죽음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난민촌에서 3km쯤 떨어진 묘지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한 팔레스타인 소년(15)은 “이슬람 전사가 돼 이스라엘군을 죽이는 게 나의 꿈”이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거듭되는 유혈충돌과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탓에 가자지구는 ‘가난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팔레스타인의 실업률을 50% 정도로 추정하고 있지만,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7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3명 가운데 2명이 실업자란 얘기다.
가자지구 취재에 도움을 준 팔레스타인 운전사 무하마드 아흐히야(39)는 이슬람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학사 출신으로 1987년 1차 인티파다(1987~93년) 기간중에 이스라엘군에 붙잡혀 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아흐히야는 “풀려난 뒤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해 한때는 날품까지 팔았다”고 말했다. 가자에는 아라파트에 비판적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친(親)아라파트 무장조직인 알 아크사, 순교여단 등 비정규 무장세력이 포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비해 이스라엘의 강점과 봉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지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지난 5월 중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 진입하기 위해 탱크까지 대기했지만 결국 작전을 취소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구가 밀집된 가자에서 이스라엘군이 작전을 편다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서안지구 예닌 난민수용소에서의 학살 때문에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샤론 정권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측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탓에 이스라엘 병사들의 많은 희생이 예상된다는 점도 고려된 듯하다.
벤 엘리제르 국방장관은 “정치적 고려는 없다. 군사적 공격을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가자지구에 피바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가뜩이나 가난에 지친 가자 사람들은 조만간 이스라엘군의 침공이 있을 것으로 보고 긴장하는 모습이다. 실업과 경제난으로 얄팍해진 지갑을 털어 식량과 물, 생활필수품을 사재기하고 있다. 자발리야 난민수용소 등에 포진한 저항세력들은 비선(秘線)조직들을 점검하면서 이스라엘군의 침공에 대비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가자 시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저항, 그리고 희망 없는 내일과 이스라엘군의 전면 침공에 대한 불안이다. 가자지구는 360km2의 좁은 면적에 110만명이 거주하는 인구밀집 지역이다. 유대인 정착민 3000여명이 가자지구의 노른자위 땅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고,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시를 중심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자지구에는 유대인 정착민 6000명을 보호하기 위해 약 2만명에 이르는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지중해를 따라 난 좁은 회랑에 갇혀 지낸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가자를 벗어날 수 없고 서안지구로의 이동도 봉쇄돼 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를 정확히 3등분해 길목마다 검문소를 세워놓고 주민들의 이동을 막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불도저에 집을 잃은 난민 가족들이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취재하기 위해 아침 일찍 가자시를 출발했다. 가자시 남쪽의 지중해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30분 남짓 달리자 거대한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줄잡아 1000대 가량의 차량이 멈춰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맨 앞쪽으로 가보았다. 한 택시운전사에게 “언제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어제 밤 8시에 이곳에 닿아 차안에서 밤을 새웠다. 이전에는 30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다”고 대답했다. 운전석 뒷자리에는 샤리를 쓴 젊은 여인 2명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가자 시내에 있는 이슬람대학에 재학중인 여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이스라엘군이 보안을 구실로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수시로 길을 막고 있어 이렇게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약 100m 떨어진 곳에 이스라엘군의 검문소가 보였다. 필자는 걸어서라도 그곳을 통과할 요량으로 이스라엘 검문소 쪽으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초소 안에 있던 이스라엘 군인이 필자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내면서 “당신이 취재기자든 뭐든 우린 상관이 없다. 상부의 지시 없이는 아무도 이곳을 지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한 병사는 “아라파트가 와도 못 지나간다”며 낄낄거렸다.
다시 팔레스타인 차량 행렬로 돌아오자, 필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 팔레스타인 젊은이가 “저들이 총을 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당신은 오늘 운이 좋은 것 같다. 내가 갔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의 무분별한 사격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는 얘기였다.
가자지구 엘 부레이 난민수용소 부근에선 길 가던 모녀(40대 초반의 여성과 12세 소녀)가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들 모녀처럼 이스라엘군의 마구잡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엘 부레이 난민수용소에서의 장례식은 너무나 조촐했다. 유족들은 상복을 입지도 않았고, 조화(弔花)도 없었다. 유족들이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겐 죽음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난민촌에서 3km쯤 떨어진 묘지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한 팔레스타인 소년(15)은 “이슬람 전사가 돼 이스라엘군을 죽이는 게 나의 꿈”이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거듭되는 유혈충돌과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탓에 가자지구는 ‘가난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팔레스타인의 실업률을 50% 정도로 추정하고 있지만,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7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3명 가운데 2명이 실업자란 얘기다.
가자지구 취재에 도움을 준 팔레스타인 운전사 무하마드 아흐히야(39)는 이슬람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학사 출신으로 1987년 1차 인티파다(1987~93년) 기간중에 이스라엘군에 붙잡혀 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아흐히야는 “풀려난 뒤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해 한때는 날품까지 팔았다”고 말했다. 가자에는 아라파트에 비판적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친(親)아라파트 무장조직인 알 아크사, 순교여단 등 비정규 무장세력이 포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비해 이스라엘의 강점과 봉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지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지난 5월 중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 진입하기 위해 탱크까지 대기했지만 결국 작전을 취소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구가 밀집된 가자에서 이스라엘군이 작전을 편다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서안지구 예닌 난민수용소에서의 학살 때문에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샤론 정권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측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탓에 이스라엘 병사들의 많은 희생이 예상된다는 점도 고려된 듯하다.
벤 엘리제르 국방장관은 “정치적 고려는 없다. 군사적 공격을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가자지구에 피바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