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 중에서 걸출한 지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개는 실체보다 과장되어 있어 검증이 필요하다. 한때 세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폴란드의 바웬사, 체코의 하벨, 아르헨티나의 알폰신, 멕시코의 살리나스,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한국의 김영삼 등의 좌절과 몰락이 그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이점에서 브라질의 카르도조와 한국의 김대중은 지도자로서는 단연 압권이다. 사회학자 출신의 카르도조와 직업정치인인 김대중은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나 민주화 과정에서, 경제위기의 극복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브라질에 가면 다음과 같은 농담을 듣는다. “동물원에서 사자 두 마리가 탈출했는데, 한 마리는 하루 만에 잡힌데 반해 다른 한 마리는 두 달 만에 잡혔다. 한 마리는 공원에서 사람 잡아먹다가 주민의 신고로 비쩍 마른 상태로 잡혀왔다. 그런데 다른 한 마리는 살이 통통하게 찐 채로 잡혀왔기에,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관공서에 숨어 공무원 잡아먹으면서 잘 지냈는데 그만 커피 나르는 급사를 잡아먹다가 신고되어 잡혀왔다고 한다. ‘급사가 아닌 공무원만 계속 잡아먹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라고 그 사자가 후회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다. 이 농담의 요체는, 브라질의 관공서에 일하지 않고 봉급만 받는 ‘식객’이 하도 많은 나머지 공무원이 없어져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브라질 관료제는 극도의 낭비와 낮은 효율로 얼룩진 브라질 사회의 단면이다.
카르도조는 국회의 반대와 거리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부`-`금융`-`연금`-`농지`-`의료 분야의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전화`-`전력`-`철강`-`가스`-`철도`-`은행 등 주요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단행했다. 그래서 그는 좌파로부터 다국적기업의 앞잡이, 우파로부터는 사회주의의 대변인이라는 상반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카르도조가 한국을 국빈방문한다. 경쟁력 강화를 통해 지구경제로의 통합을 강조하는 그의 시장친화적 정책처방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분배개선과 복지증진에 기여해 왔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와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신자유주의로의 변신은 종속이론가로서 신식민주의와 타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카르도조의 고민은 그의 반대자들에 비해 지지자들이 조직화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그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민주적이다. 브라질의 정치는 인기영합적인 무책임한 민중주의(populism)와 엘리트 중심의 강압적인 권위주의 사이를 넘나들어왔다.
민주적인 국정운영·진솔한 리더십 ‘벤치 마킹’ 해야
그러나 그는 두 가지를 다 거부한다. 대체로 중남미 정치가 대통령의 힘이 과대하게 작용하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통상이라면 카르도조의 브라질은 예외다. 그는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대중선전과 인기몰이를 하는 여느 대통령과는 확실히 다르다.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다른 열광적 후보들을 제치고 두 차례나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거짓과 위선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두 번에 걸쳐 민간정부를 경험했지만 우리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과신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를 위해 심신을 바친 투사의 이력치고는 국정운영 방식이 권위주의적이다. 법치는 인치에 가려 있고 통치가 협치(協治)를 누르고 있다. 여야가 뒤바뀌었다지만 꼼수와 숫자에 의한 정치는 변화없이 윤회(輪回)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독재자’가 나오게 된 까닭이 나라의 구조 탓인지, 민도와 문화가 낮아서 그런지, 아니면 지도자의 본성 때문인지 헷갈린다.
한국사회는 신뢰가 약한 사회다. 대통령이 원칙과 절차를 겉으로 말하면서 속으로 파행과 술수를 부리면 국민의 믿음은 깨지게 되어 있다. 카르도조가 제국주의 투항자라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브라질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것은 ‘강한 정부’가 아니라 그의 진솔한 리더십에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카르도조는 국회의 반대와 거리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부`-`금융`-`연금`-`농지`-`의료 분야의 개혁을 밀어붙이면서 전화`-`전력`-`철강`-`가스`-`철도`-`은행 등 주요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단행했다. 그래서 그는 좌파로부터 다국적기업의 앞잡이, 우파로부터는 사회주의의 대변인이라는 상반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카르도조가 한국을 국빈방문한다. 경쟁력 강화를 통해 지구경제로의 통합을 강조하는 그의 시장친화적 정책처방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분배개선과 복지증진에 기여해 왔다.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와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신자유주의로의 변신은 종속이론가로서 신식민주의와 타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카르도조의 고민은 그의 반대자들에 비해 지지자들이 조직화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그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민주적이다. 브라질의 정치는 인기영합적인 무책임한 민중주의(populism)와 엘리트 중심의 강압적인 권위주의 사이를 넘나들어왔다.
민주적인 국정운영·진솔한 리더십 ‘벤치 마킹’ 해야
그러나 그는 두 가지를 다 거부한다. 대체로 중남미 정치가 대통령의 힘이 과대하게 작용하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통상이라면 카르도조의 브라질은 예외다. 그는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대중선전과 인기몰이를 하는 여느 대통령과는 확실히 다르다.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다른 열광적 후보들을 제치고 두 차례나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거짓과 위선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두 번에 걸쳐 민간정부를 경험했지만 우리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과신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를 위해 심신을 바친 투사의 이력치고는 국정운영 방식이 권위주의적이다. 법치는 인치에 가려 있고 통치가 협치(協治)를 누르고 있다. 여야가 뒤바뀌었다지만 꼼수와 숫자에 의한 정치는 변화없이 윤회(輪回)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독재자’가 나오게 된 까닭이 나라의 구조 탓인지, 민도와 문화가 낮아서 그런지, 아니면 지도자의 본성 때문인지 헷갈린다.
한국사회는 신뢰가 약한 사회다. 대통령이 원칙과 절차를 겉으로 말하면서 속으로 파행과 술수를 부리면 국민의 믿음은 깨지게 되어 있다. 카르도조가 제국주의 투항자라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브라질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것은 ‘강한 정부’가 아니라 그의 진솔한 리더십에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