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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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 대조사전 ‘천년 고찰’ 벌써 예약

9년 대역사 거쳐 소백산에 우뚝…기와·목재 하나하나에 장인의 혼 가득 ‘문화재급 걸작’

  • 입력2005-05-27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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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인사 대조사전 ‘천년 고찰’ 벌써 예약
    충북 단양군 소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구인사(救仁寺) 대조사전이 착공 9년 만에 자태를 드러냈다. 가을 단풍이 흐드러진 수리봉을 배경 삼아 우뚝 솟은 3층 목조건물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잘 익은 홍시 색깔의 아름드리 기둥이다.

    지름 75cm 가량의 이 기둥은 태백산에서 찾아낸 수령 300년도 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다. 적송이라면 나이테가 가늘어 결이 곱고 그만큼 강도도 높아 천년을 버틸 귀한 재목으로 알려져 있으나 요즘은 이런 나무를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도편수 신응수씨(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는 대조사전을 지으면서 50만재(11t 트럭 130대 분량)나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행복한’ 목수인지 알 수 있다.

    사용된 적송만도 11t트럭 130대 분

    구인사가 천태종 중창조이자 구인사 개산조인 상월대조사의 존상을 모시기 위해 대조사전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 1985년 7월의 일. 그로부터 한달 뒤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일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 건립을 결정하고 터까지 잡아놓은 대충스님(2대종정)이 “새로 짓는 대조사전은 세계적인 문화재급 건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기본설계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30평짜리 평범한 법당으로 구상됐던 것이 50평으로 확대됐다, 나중에는 단층이 아닌 중층이 되고 기왕이면 국내에서 보기 힘든 3층짜리 최고 건물을 지어보자는 쪽으로 발전했다. 설계야 머리 속 구상대로 이리저리 바꾸면 된다지만 문제는 나무였다. 도편수 신응수씨는 대조사전의 설계가 변경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나무를 준비해야 했다.



    “30평짜리라고 해서 거기에 맞게 나무를 준비해 잘라 놓았는데 50평으로 해보자는 겁니다. 다시 나무를 준비해 놓았더니 또 중층 건물로 해보자 하니 설계대로 잘라놓은 나무가 또 못쓰게 됐지요. 평수가 커지면 집이 높아지고 기둥이 굵어져야 비례가 맞아요. 이렇게 설계를 변경하고 나무 준비하다 수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1층 86평, 2층 55평, 3층 27평, 총 167평의 다포집으로 짓는다고 결정하고 나니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미 4년이 흘러버렸다. 드디어 92년 5월28일 기공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완공까지는 또 그로부터 9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천년을 버틸 문화재를 만들겠다는 장인의 욕심도 작용했다. 신응수씨는 기둥을 다 만들어 놓았다가도 더 굵고 좋은 재목이 나오면 미련 없이 교체했다. 이러기를 수 차례.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 맨끝 기둥은 워낙 굵어 석공이 미리 준비해 놓은 원형 주초(柱礎)가 작을 지경이었다. 밑동 부분을 조금 깎아 겨우 맞추긴 했지만 살짝 배흘림기둥이 돼버렸다. 전체적으로 시원스럽게 위로 쭉쭉 뻗은 민흘림 기둥인데 이 기둥만 조금 달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처음부터 종교적 의미를 넘어 문화재급 건물을 짓겠다는 의지를 보인 구인사측은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고, 무형문화재인 신응수 대목장과 조찬형 소목장뿐만 아니라 석장 단청장 기왓장 모두 저마다 일생일대의 걸작을 남기기 위해 솜씨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대조사전은 사찰이라기보다 궁궐에 가까운 화려하고 웅대한 자태를 자랑한다. 특히 아래서 올려다 본 포와 처마 부분은 이 건물의 백미. 건물 양끝 45도 모서리 부분에서 보면 기둥 위로 외7포 내11포(1층)의 웅장한 규모에 포 하나하나가 아름드리 나무로 깎은 정교한 조각작품이다. 하늘로 치켜올라간 듯한 포의 마구리 부분과 역시 살짝 곡면을 드러내며 하늘을 향한 추녀가 날렵하다. 화려한 다포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대조사전은 궁궐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기둥 윗부분은 문양으로 꽉 채운 금단청(단청의 화려함이 비단 같다는 의미)을 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 칸을 이루는 부분의 문은 모두 금(金)칠 하나로 통일한 것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원래 문은 사찰의 것을 최고로 친다. 궁궐이나 민가에서는 亞자 형태나 세살 등 단순한 문살을 사용하지만, 사찰에서만 화려한 꽃살문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조사전의 문도 연꽃 모란 등 다양한 꽃살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는데 5색 채색 대신 금분만 입혀 오히려 조각이 두드러져 보인다.

    밖에서는 3층 구조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된 법당에 대조사의 금동존상과 탱화가 모셔졌고 33포 12.5m 높이의 닷집에 108 나한이 모셔진 것도 국내 최초다.

    그러나 눈으로만 보지 말고 꼭 만져서 느껴볼 부분이 석물(石物)들이다. 주초, 계단, 난간 장식, 건물 좌우측의 금강신장(5m) 모두 강화애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원래 강화애석은 왕릉의 상돌을 만들 때 사용했다고 한다. 희디 힐 뿐 아니라 결이 매우 고와서 조각을 많이 넣지 않은 그 자체로도 우아하다.

    단아한 기단 위에 우뚝 솟은 홍시색깔의 기둥, 그 사이 사이를 연결하는 금빛 문살, 위로 올라갈수록 화려한 단청에 날렵한 추녀 끝이 하늘을 찌르는 대조사전의 자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쉽게 눈에 띄는 부분에만 감탄한 일이 아니다. 산등성에서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햇살이 부서지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빛이 반사돼 색깔이 분명치 않으나 가까이 들여다 보면 황금기와, 정확히 말하면 붉은빛이 감도는 황금색 자기기와 3만여장이 얹혀 있다. 사실 이 기와에 얽힌 사연만도 며칠 밤 이야깃거리다.

    대조사전 건립이 확정되지도 않았던 83년, 대충스님이 울산의 기와장 오세필씨를 불러 “황금기와를 만들어보라”고 주문했다. 그때까지 황금기와라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오씨는 적당히 유약만 쓰면 쉽게 황금색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유약 바른 기와를 가마에서 구우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뒤늦게 황금결정유약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교과서대로 구우면 절대 제 색깔(칠 형태가 아니라 점점의 유약이 퍼지면서 색을 내는 것)이 나오지 않았다. 또 기와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백자 제작용 흙으로 빚어 1300도에서 굽는 일 자체가 기존의 기와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기와 두께가 너무 얇으면 굽는 도중 폭삭 주저앉아 버렸고, 너무 두꺼우면 하중이 지붕에 큰 부담이 됐다. 오씨가 유약의 배합과 기와의 적절한 두께, 가마의 온도와 시간을 알아내는 데만 15년 가까이 걸렸다.

    흔히 황금기와라 하면 중국 자금성 것을 드는데 그것은 1000도 이하의 낮은 불에서 초벌구이만 한 것으로, 유약이 쉽게 흘러내리고 벗겨지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대조사전의 도자기 기와와는 비교도 안 된다.

    신응수씨도 고건축에서는 지붕이 건물의 수명을 좌우한다고 했다. 한국고건축의 약점은 지붕 부분. 세월이 지나면 지붕의 흙이 밀려 기와 틈새가 벌어지고 비가 새 나무가 썩는다. 그래서 궁궐조차도 20년이 못 돼 기와를 바꾸고 수시로 지붕 개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다.

    신씨는 서까래 위에 얇게 송판으로 만든 기와를 깐 뒤 다시 자기 기와를 얹고, 진흙은 최소한으로 해서 무게를 줄이는 대신(자기 기와는 보통 기와보다 20% 정도 무겁다) 중간중간 기와끼리 동선으로 묶어 단단히 고정했다. 그래서 대조사전은 전통양식으로 지어졌다지만 지붕부분만큼은 새로운 공법을 개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조사전을 “천년 앞을 내다보고 지은 건물”이라 하는 것은 지붕말고도 기초의 견고함 때문이다. 적당히 흙을 파내고 콘크리트를 부어 만드는 요즘 기초와는 개념이 다르다. 단단한 암반이 나올 때까지 얕은 곳은 5m, 깊은 곳은 11m까지 흙을 파내려간 뒤 암반이 나오면 평평하게 깎아 그 위에 강도가 높은 가평석을 다듬어 거대한 석축을 쌓았다.

    경복궁 같은 궁궐을 짓는 데나 사용하는 기초공법으로 이 작업에만 3년이 소요됐다. 11월5일 낙성 법요식을 열고 일반에 공개된 대조사전은 불교 건축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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