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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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내 것이야!”

‘스타 오빠’ 동성애 다룬 ‘팬픽’에 10대 열광…스타에 대한 ‘소유욕’의 반영

  • 입력2005-05-27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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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는 내 것이야!”
    토니는 울면서 우혁에게 달려온다. 그리고 이내 우혁이 품에서 계속 울었다… 토니의 입 속에 달콤한 우혁이의 입술이 들어온다. ‘우혁아… 나… 이 입술… 평생토록 잊지 않을 거다… 사랑해….’”

    “망설일 겨를도 없이 우혁은 승호의 입에 몰래하는 키스답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승호의 입으로… 달콤한 목으로… 쇄골로… 승호의 물기 어린 신음이 우혁의 귓가에 어려온다….”

    흔히 ‘야설’이라 불리는 인터넷 성인소설의 한 부분처럼 보이는 이 글들은 작가도 독자도 성인이 아닌 10대 소녀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HOT, god, 신화 등 10대들에게 추앙받는 인기 댄스그룹의 멤버들.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 그룹멤버끼리의 애정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 많다. 말하자면 10대 스타들의 동성애 소설인 셈. 이른바 ‘팬픽’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쓴 ‘팬픽’(팬과 픽션의 합성어)은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키워드로 치면 수백 개의 사이트 목록이 뜨는 걸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팬클럽 사이트에는 ‘픽션방’‘소설방’이라는 이름의 팬픽 코너가 있다. 2, 3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팬픽은 최근 10대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내용이 쓰이고 읽힌다.

    인터넷 사이트 수백개… 폭발적 인기



    원래 팬픽의 창작 취지는 팬클럽 회원들이 스타를 주인공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 서로 돌려가며 읽는 것이었다. 스타에 대한 열정을 글쓰기 형식을 통해 표출하는 것으로, 이는 팬클럽 활동을 연장하는 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동호회 활동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작품에서 동성애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성적 표현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작년 한 방송사에서 HOT 멤버들을 소재로 한 팬픽에서 동성애를 다룬 사실을 문제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나자, 소녀팬들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거나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려 “방송국을 폭파하겠다” “방송이 나가면 첫번째 희생자는 내가 될 것”이라고 협박한 사건도 벌어졌다.

    최근 정보통신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통신질서확립법 법률개정안에는 ‘인터넷 내용 등급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 유해정보에 대해 정보제공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내용 등급을 표시하라는 것. 이 소식을 접한 소녀팬들은 팬픽이 청소년 유해정보로 구분될 것을 우려해 정부 방침에 반발하며 한 목소리로 ‘검열 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홈페이지 게시판과 진보네트워크센터의 통신질서확립법 반대사이트에는 “팬픽은 우리에게 사막의 오아시스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달라” “팬픽도 엄연한 문학이다. 우리의 창작권을 빼앗지 말라”는 10대들의 글이 답지했다.

    미소년들을 등장시킨 일본의 동성애 만화 (야오이)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리에 유통되는 상황에서, 역시 동성애를 다룬 팬픽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해 일선 교사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시한다. “팬픽의 언어와 장면 묘사는 일본 동성애 만화에서 모방한 듯, 비슷한 것이 많다. 성(性)을 오락과 유희의 대상으로만 그리고 있어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성 가치관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고 김성천 교사(과천중앙고등학교)는 말한다.

    야오이물이 미소년들끼리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면, 팬픽은 ‘스타 오빠들’끼리의 사랑을 다룬다. 차이는 분명하다. 남학생들을 위한 포르노물로 유통되는 야오이와 달리 팬픽은 똑같은 동성애를 다루면서도 동성애의 성적 측면보다는 ‘나의 우상인 오빠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소녀적 감성에 충실한 편이다. 여성을 등장시키지 않으려다보니 자연히 남성 멤버들끼리의 관계가 주된 내용을 이루게 되는 것.

    청소년직업센터 ‘하자’에서 논술 강좌를 맡고 있는 송재희씨(‘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의 작가)는 “동성애적 내용을 가지고 크게 문제삼을 건 없다고 본다. 무언가를 상상하고 직접 창작을 하는 행위는 이전의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직 거칠고 낮은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학성에 대한 고민과 발전도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팬픽 현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다. 자유로운 글쓰기와 함께 건전한 비평문화가 자리잡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간다면 팬픽도 의미있는 사이버문학의 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팬픽을 ‘팬덤’(fandom)의 또 다른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열광적으로 추종한다’는 뜻의 ‘fanatic’과 집단적 증후군의 ‘dom’이 결합된 팬덤은 팬 집단의 강한 영향력을 일컫는 말로, 일방적인 스타 숭배 문화가 아니라 수용자측의 독자적인 대중문화 실천활동을 뜻한다.

    문화평론가 안이영노씨가 “팬픽은 문화적 커뮤니케이션과 다양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집단운동으로 봐야 한다. 현실세계에서의 금기와 터부를 적용해 문화 쓰레기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팬픽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 주목하는 것은 이를 발전적인 팬덤으로 보기 때문이다.

    스타에 열광하는 팬 집단은 자신들의 문화적 기호와 취향을 다른 사람들과 명확히 구별하고 차별화하려는 의식이 강하다. 또 단순히 문화를 수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팬클럽에 함께 모여 서로의 취향을 나누고 스타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팬덤’의 일종이다. 이를테면 김희선표 헤어밴드와 배두나식 헤어스타일을 흉내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고, 이정현의 핸드폰 광고 멘트를 사오정 버전, 최민수 버전 등 100여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유행시키는 것 등이 모두 팬덤 현상들이다.

    팬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10대 팬들은 스타를 아예 소유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들은 브라운관이나 콘서트장에서 스타들의 ‘만들어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스타들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가 소설의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욕구에 충실하게 스타의 모습을 조작해내고 이를 유통시킨다. 이는 팬들의 ‘문화권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스타가 대중에 의해 맹목적인 추앙을 받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팬들에 의해 ‘관리’당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일 수도 있다.

    “팬픽은 ‘추앙’의 대상인 연예인을 ‘소유와 가공’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제 스타는 내가 가질 수 있고, 내가 만든 신화체계 속에서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대상이 되었다”는 라도삼씨(중앙대 언론학 박사)의 말처럼 지금의 10대는 자신이 창조한 각본에 따라 스타를 ‘연출’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팬픽을 ‘창조적인 의사표현의 시작’으로 평가하기에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팬픽에 나타나는 스타의 모습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상일 뿐이다. 이는 스타와 팬의 신화적 관계를 오히려 지속시키는 것으로 공연장에 가서 열광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팬픽의 대상이 되는 스타들의 경우,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고 동성애자로 표현되는 것 등이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으나 글쓴이가 자신들의 팬이란 것 때문에 그냥 두고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룹 NRG의 매니저 박계은씨는 “기분이 좋진 않지만 상대가 팬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내용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긴 어렵다. 인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그냥 모른 체한다”고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팬픽은 스타에 대한 팬들의 종속성을 높여주는 상업적 통로로 기능하는 차원도 크다. 팬픽에서 특정 주인공이 사라지는 날 현실 속 스타의 인기도 시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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