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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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훈장공화국’

DJ정부 들어 연평균 1만1200개… 공적 관계없이 선심성 남발 ‘권위 추락’

  • 입력2005-05-26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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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훈장공화국’
    감사원 인사과의 책상 속에는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녹조근정훈장 하나가 잠들어 있다. 99년 12월31일자로 퇴임한 이문옥 전 감사관이 “부정부패 방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패방지법 제정이 유예되는 상황에서 훈장을 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부한 훈장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어쩔 도리가 없어 이씨가 찾아갈 때까지 보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타계한 소설가 황순원 선생도 1996년 정부의 은관문화훈장 수상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했었다. 이는 훈장이 정말로 영예의 상징으로 대접받고 있는지 의구심을 낳게 하는 사례다.

    1948년부터 2000년 9월까지 수여된 훈장은 모두 38만1403개(‘표’ 참조). 지난 4·13 총선 당시 유권자수(3348만2387명)를 기준으로 본다면 유권자 88명 중 1명은 훈장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남발은 ‘희소성’이라는 훈장의 기본 존재가치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너도나도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훈장이라면 훈장을 주는 행위나 받는 행위가 모두 별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훈장공화국’이며 ‘훈장인플레’가 심하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훈장의 거품’이라고나 할까.

    행정자치부가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들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김대중 정부가 98년부터 2000년 9월까지 수여한 훈장은 4만5980개. 연평균 1만1200개다. 이것은 김영삼 정부 때의 연평균 6660개, 노태우 정부 때의 연평균 5035개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다.

    형평성 문제 제기… 반납도 줄이어



    특히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주는 국민훈장의 경우 1948년부터 1987년까지 수여된 숫자가 1만2730개인데 비해 현 정부는 99년 한해에만 이보다 더 많은 1만8562개를 수여했다. ‘직무에 정려하여(부지런히 힘써)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주는 근정훈장의 경우도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를 합쳤을 때(1만2714개)보다 많은 1만7380개를 줬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왜 이렇게 훈장을 남발한 것일까. 행정자치부 상훈과의 한 관계자는 “남발이 아니다”고 말한다. “공무원의 명예퇴직이나 교원들의 정년 인하로 퇴직자가 늘어 갑작스럽게 국민훈장과 근정훈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설명에는 기본적으로 이 두 훈장이 ‘퇴직자 전원에게 주는 것’이란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 현 정부는 33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한 공무원 전원에게 훈장을 줬다.

    그러나 상훈법 2조 ‘서훈의 원칙’에는 ‘훈장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우방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고 돼 있다. 무공훈장 등 11종류인 훈장의 각 항목에도 ‘공적이 뚜렷한 자’라는 수여자격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훈장을 줄 때 이 대목을 들여다보지 않는 듯하다. 행자부 관계자의 설명대로라면 ‘33년 이상 근무한 모든 공무원’으로 서훈 규정을 바꿔야 할 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불만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공수훈자들이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원호 사무총장은 “국가에서 훈장을 남발하다보니 국민들이 모든 훈장을 똑같이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조국을 위해 생사를 넘나들며 받은 무공훈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광주학살 관련자들이 받은 무공훈장(모두 33개)을 정부가 치탈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다. 상훈법 8조에는 ‘서훈공적이 허위임이 판명된 때’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때’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죄를 범한 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훈장을 치탈한다고 돼 있다. 무공훈장 서훈자 가운데는 직접 전투 현장에 있지 않았던 지휘관들도 일부 들어 있어 형평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작년부터는 일부에서 훈장을 반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경기도 화성 씨랜드 화재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김순덕씨가 99년 8월3일 체육훈장을 반납한 것을 필두로, 서울 방학중학교 김기종 전 교감 등 일부 퇴직교원들도 훈장 포기각서를 제출했다. 99년 9월에는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동대문지회 소속원들이 다른 수훈자들과의 형평 대우를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훈장 18개를 국무총리실에 반납한 일이 있다. 이 밖에 독립유공자유족회에서도 연금 수혜 범위를 넓혀줄 것을 요구하며 건국훈장 20개를 반납하는 등 지금까지 모두 60여개의 훈장이 정부에 반납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훈자들은 훈장이 훈장으로서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현재 모두 11종류(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하고 각 훈장별로 5등급으로 나뉘어 있어 실제로는 51종류)인 훈장 종류를 대폭 줄이고 심사를 강화해 수훈자 숫자를 줄이는 등 제도상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훈장을 받으면 무슨 혜택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그 자체가 명예이므로 큰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 무공훈장(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 및 보국훈장(국가 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을 받으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무공훈장 수훈자일 경우 사망시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고 항공료 30% 할인, 보훈병원 사용료 60% 할인 등의 혜택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훈장을 받았을 경우에는 특별한 혜택이 없다.

    훈장은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훈장 수여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다음부터다. 1979년 1882건이던 것이 1980년에는 3150건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때부터 꾸준히 증가해 1987년에는 1만건을 넘었다. 임기말에 선심성으로 훈장 수여를 남발하는 등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훈장 수여를 통해 보완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까지 2376개가 수여된 새마을 훈장은 1988년부터 올 9월까지 342개가 수여되는 데 그쳤다. 체육훈장은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 462개, 서울올림픽이 있던 1988년 371개 등 5, 6공 시절에 많이 수여됐다. 6공 때만 1325개가 수여된 반면 1993년부터 올 9월까지 수여된 숫자는 537개에 불과하다.

    반면 문화훈장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6공 시절까지 한해 30개도 안 됐던 문화훈장 수여는 김영삼 정부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최근에는 50개를 넘나들고 있다. 문화부 관계자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장-차관을 지낸 사람들에게 의례적으로 수여하던 청조근정훈장과 황조근정훈장이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 마지막 장-차관들에게 수여되지 않은 것도 훈장과 시대상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의 훈장 수여 증가는 우리 사회의 기본틀을 바꾸는 과정에서 공무원이나 교원들의 명예퇴직에 대한 보상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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