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웠다. 늦게 온 것이 부끄러웠다. 기자는 일본 기자들이 이미 다녀간 길 위에 서있었다. 그마저 시간에 쫓겨 그들이 다녀간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지도 못한 채 취재를 마쳐야 했다. 적지 않은 할머니들이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다. 그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주간동아’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의 초청으로 한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10월14일부터 21일까지 일제(日帝)의 일본군 ‘성적 노예’ 범죄 희생 실태를 방북 취재했다. 그러나 ‘주간동아’에서 당초 인터뷰하고자 했던 일제의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의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은 앓아 누워 있거나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육성으로 성노예 범죄를 고발하는 데는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우선 지난 90년 11월 남한에서 창립된 사단법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상임대표 윤정옥)에 이어 92년 8월 북한에서 창립된 민간단체인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종태위·위원장 홍선옥)의 실무 책임자와 전문학자 인터뷰와 실증적 자료를 통해 일제의 성노예 범죄가 북한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0년 전의 일본군 성노예 범죄 문제가 유엔을 통해 국제문제화된 데는 이 두 단체의 활약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북한 현재까지 218명 파악… 43명 공개 증언
그 결과 유엔인권위원회 산하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차별소위)가 채택한 두 차례의 특별보고서는 정식으로 일제의 ‘군대 위안부’를 ‘성적 노예’(sexual slavery)로 ‘군대 위안소’를 ‘강간소’(rape center)로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이 두 단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남한에서는 통상 정신대라는 용어가, 북한에서는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통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는 편의상 두 용어와 ‘성적 노예’라는 표현을 함께 쓴다).
북한에서 종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공식 제기된 때는 1992년 5월3일이다.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에 살던 리경생씨는 자신이 1929년에 강제 연행되어 경남 창원군에 있던 한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의 감시 하에 5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다. 3세 때 부모를 여읜 리씨가 군수공장에 끌려간 것은 남의 집 ‘아이보개’를 하던 12세 때였다. 그러나 리씨와 함께 끌려온 비슷한 또래의 처녀아이 20명은 일본군 장교의 시중을 드는 일부터 시작하다가 몇달 안 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리씨는 하루 평균 20명을 ‘상대’했다. 그러다 16세 되던 해에 임신을 하자 일본군은 리씨의 배를 째고는 태아를 꺼내 패대기를 쳐서 강물에 던지고 다시는 아이를 배지 못하게 한다며 칼로 자궁을 들어내버렸다. 리씨는 1933년 9월 철조망 밑을 파고 생지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으로도 방영된 리씨의 공개증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수많은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리씨의 증언을 계기로 김대일(84·개성시 개풍군 해평리) 윤경애(80·황해도 은파군 구련리) 등 공개증언자들 속속 나타났다. 그런 배경 하에서 그해 8월 종군 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보상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종태위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공개증언 물꼬를 트고, 92년 10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일본의 전시 죄행에 관한 국제회의’를 시작으로 수많은 일제의 전쟁 범죄 관련 국제회의의 ‘단골 증언자’였던 리씨는 ‘고난의 행군’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종태위의 황호남 서기장(58쪽 인터뷰 참조)에 따르면 리경생씨의 증언을 계기로 종태위가 현재까지 조사 발굴한 종군 위안부 피해자는 218명이다. 그 가운데 43명(19.7%)이 공개증언에 나섰다.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80%는 본인과 가족, 혹은 친척들의 반대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종태위는 지난 95년 8월 그때까지 채록한 피해자 40명의 공개증언을 엮은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외침’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 뒤로 현재까지 5년 동안 피해자 3명이 추가로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증언자보다는 고령과 노환으로 죽어간 증언자들이 훨씬 더 많다. 다만 종태위 황호남 서기장은 피해자 218명 중에서 현재까지 사망한 사람이 몇명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95년부터 집중된 자연재해와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통신-행정망의 미비와 인력난을 반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현지까지는 ‘다리품’을 팔지 않고서는 확인하기가 어려울 만큼 행정망이 미비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종태위가 최근 작성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실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위안부에 대한 모집-연행은 일본 정부와 공권력을 배경으로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첫째가 거주지에서 혹은 여행 중에 납치하거나 강제 연행해 성노예 생활을 강요한 경우로 피해자 218명 중 96명(44%)이나 된다. 두번째는 좋은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 속여 위안소에 데려가 억류한 다음 ‘위안부’를 강요한 경우로 이 또한 74명(34%)이나 된다. ‘일제판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이 두 가지 유형이 전체의 78%다. 그 나머지는 일본군 지령으로 위안부 모집에 나선 민간업자에게 빚에 팔려가거나 ‘근로정신대’ 명목으로 모집되었다가 나중에 위안부로 다시 강제 연행된 경우다.
한편 이들의 연행 당시 나이를 보면 △16∼19세가 92명(50.5%) △20∼24세가 54명(29.7 %) △12∼15세가 34명(18.7%)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10명 가운데 7명이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미성년 인신매매’에 해당된다. 그것도 군이 직접 개입한 미성년 인민매매다(‘표’ 참조).
학계에 따르면 약 20만명의 당시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의 존엄과 정조는 물론 생명까지도 유린당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 ‘위안소’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신품은 장교용’이라는 군대 위계질서에 따라 장교한테서 며칠 동안 ‘성 봉사’를 강요당한 뒤 병사들에게 넘겨졌다. 그중 용모가 뛰어난 여성들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전 기간에 걸쳐 ‘장교들의 독점물’이 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위안부’들은 ‘위안소’에 도착한 날부터 일본 이름으로 불리거나 혹은 이름 대신 방 번호로 불렸다. 위안소에서는 위안부들 사이에서조차 말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없었으며 조선말 사용은 금지되었다. 이들은 식사시간과 용변 보는 시간 외에는 방안에서 나올 수 없었으며 24시간 보초병의 감시 속에 있었다.
위안부들에게는 약속된 ‘복무기한’이 따로 없었다. 그들의 ‘복무기한’은 위안소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든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였다. 공개증언에 동의한 43명의 피해자들이 강요당한 ‘복무기한’은 평균 4년 2개월이었다. 그중에는 10년 동안이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원룡화씨(84·황해도 봉천군 대룡리)를 비롯하여 8년 동안이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 5명, 5년 이상 강요당한 여성이 6명이나 된다. 이들은 고향에 있는 부모 친척들과의 편지 왕래를 할 수 없었으며 사망해도 일본군은 ‘사망통지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안부들은 보통 한 사람이 평일에는 하루 20∼30명 정도, 일요일에는 40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의 ‘위안소 규정’에 따르면 사병들은 비번근무인 1주일에 한번씩 낮에 위안소를 출입하게 돼 있었으나 장교들은 주로 밤에 수시로 출입했기 때문에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위안부 관리 규정에 따른 휴식시간을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또 일제는 성병 예방 및 ‘군수품’(위안부)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병사들에게 콘돔을 지급했으나 병사들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 임신하는 위안부가 발생하면 그 위안부에게 강제 유산약을 주사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군인들에게 쉴새없이 봉사해야 하고 매일같이 당하는 폭행과 보잘것없는 식사로 인해 연약한 여성들은 얼마 못 가 병에 걸리거나 사망했고 자살하는 위안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새로운 위안부들이 보충돼 왔다.
일본군의 조선 위안부들에 대한 만행은 이미 유엔 인권위원회가 채택한 두 차례의 보고서에서도 규정되었지만 그 비참성과 잔인성 면에서 종래의 ‘전시폭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리경생씨의 경우처럼 임신한 위안부들의 자궁을 통째로 들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성병 예방을 핑계로 자궁에 불에 달군 쇠몽둥이를 집어넣기도 했다.
성노예 생활을 거절하는 여성들에겐 온갖 폭행이 가해졌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위안부들을 다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완강히 반항하는 여성을, 군도로 목을 베거나 생식기에 총을 난사하는 것과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써 다른 위안부들을 순종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도망치다가 붙잡힌 위안부들의 온몸에 제재의 표시로 입묵(入墨)까지 해놓았다. 정옥순씨(80·황해도 강령군 사연리)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14세에 일본 국경수비대에 강제 연행된 정씨는 동료 위안부 12명과 함께 중국 광저우(廣州)의 군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쇠몽둥이로 얻어맞고 물고문을 당한 끝에 입묵을 당했다. 일본군은 바늘 같은 것이 많이 붙어 있는 주먹만한 물건에 먹을 붙인 도구를 사용해 입과 혀, 가슴과 배, 심지어는 음부 부위 등 온몸에 ‘도주자의 표식’을 남겼다. 이런 고문 끝에 들판에 내던져진 정씨는 국혜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함께 중국 농민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정씨지만 이런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 채 얼마 전에 사망했다.
리종녀씨(78·황해도 벽성군 옥정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 때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꾐에 빠져 인천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리씨 또한 도망치다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은 다리와 허벅다리에 몽치를 두 개 끼우고 노끈으로 발목과 넙적다리를 묶은 뒤 휘발유를 솜에 적시어 불을 붙여 다리부터 음부까지 지졌다. 리씨는 이때 당한 고문으로 음부의 절반과 자궁 한쪽이 없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난 리씨는 부모에게 “고무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어 그렇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혼자 살던 리씨 또한 지난 95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기자는 종태위 상무위원으로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2000 도쿄국제법정’(60쪽 관련 기사 참조) 북한 검사단의 유일한 검사인 정남용 교수(사회과학원)와의 인터뷰를 통해 상당수의 남한 출신 피해자들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종태위가 발간한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외침’의 표지에 나오는 정금옥 할머니(76·남포시 룡강군 삼화리)도 남한 출신이었다.
“민간인 업소는 철조망 없어… 일본 정부의 조직적 범죄”
경북 영일군 신광면 사흡동 출생으로 9세 때부터 여관집 종살이를 하던 정씨는 15세 때인 1939년 어느 봄날 일본군 장교에게 강제 연행되어 중국 다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정할머니는 첫날 일본군 장교가 한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전장에서 고생하는 일본군을 잘 위안하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임무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일’이 무엇이며 ‘위안’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정씨는, 속옷도 없이 일본식 겉옷만 걸치게 하고 머리채를 잘린 다음 판자로 칸막이를 한 방에 밀어넣어졌다. 광복 후 정씨는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그 밖에도 리복녀(81·함북 화성군 극동노동자구) 박복이(74·함남 신포시 호남리) 리현숙(78·황해도 사리원시 미곡리) 김군숙(77·평북 피현군 대평리) 강영숙(79·평북 운전군 월현리) 최순환(79·강원도 통천군 미평리)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한 출신임이 확인되었다.
리복녀씨는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태생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길을 찾아 중국 동북부의 무단강까지 갔다가 1942년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경남 진주 태생인 박씨는 진주시 문산개화동 구장이 일본으로 보내주겠다고 속여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대만의 ‘기꾸사이로’ 일본 항공군 병영으로 끌려가 일본군 조종사들을 ‘상대’했다. 박씨는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으로 돌아와 60년 17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
서울시 동대문 태생인 리현숙씨는 18세에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으며 구사일생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모가 이미 세상을 뜬 뒤여서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살 수 없어 같이 끌려갔다 살아남은(19명 중 2명) 유일한 동무와 함께 황해도 송림으로 갔다. 역시 서울 태생인 김씨는 여학교에 다니던 1938년 9월 어느날 동창생인 경숙, 영자와 함께 시내 공원에 놀러갔다가 일제의 ‘처녀사냥’에 걸려 부산을 거쳐 중국 선양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함께 간 두 동창생은 일본군에 반항하다 살해당했다. 김씨는 “구사일생으로 도망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매춘업자들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있던 종군 위안소처럼 보초병도 가시철조망도 없었다. 종군 위안부 만행은 매춘업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당시 일본 당국의 조직적인 범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출생인 강씨는 1933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결혼한 기혼자의 몸으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 강씨는 1944년 가을에 도주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45년 12월까지 살다가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서울 노남동 태생인 최씨는 부모를 여의고 서울시내의 한 식당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1942년 6월 한 일본인의 꼬임에 속아 중국으로 갔다가 위안소 생활을 했으며 1947년 중국에서 남편을 만나 1950년 함북 회령으로 들어왔다.
정남용 교수는 “일본군은 종군 위안부를 ‘군수품’으로 취급했으며 강제 연행된 조선 여성들은 조선 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등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부대 배치상황에 따라 이동했다. 이들 가운데 공화국(북한)으로 온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남조선(남한) 출신이다”고 말했다.
지난 92년부터 일본군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을 연구해온 정남용 교수가 조사 발굴한 사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박영심씨(79·남포시 강서구역 청산리)의 경우다.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한 박씨는 14세 때 인근 양복점에 팔려가 식모로 일하다 1938년 3월 일제의 ‘처녀공출’에 걸려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난징으로 끌려갔다. 박씨는 빈 깡통을 매단 가시철조망이 쳐진 군 위안소에서 와카하루(若春)라는 예명으로 3년을 지내다 전황이 확대되자 상하이를 거쳐 미얀마 랭군 부근의 랴슈 위안소로 끌려갔다. 거기서 치욕스런 2년을 보낸 박씨는 다시 동료들(12명)과 함께 미얀마-중국 국경의 최전선지대인 마쯔야마(송산)로 끌려가 매일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하루 30∼40명씩을 상대하다 일본 패망을 맞이했다.
당시 박씨와 함께 미얀마의 격전장에 끌려갔던 위안부 12명 가운데 8명은 폭격에 맞아 죽거나 병에 걸려 죽고, 살아남은 조선 여성 4명은 그 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전쟁포로가 되어 중국 쿤밍포로수용소에서 약 7개월간 억류되었다. 이때 미군이 찍은 ‘임신한 위안부’ 사진에서 동료 3명과 함께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박씨다. 일본군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의 수난을 상징하는 이 사진의 주인공이 박씨라는 사실은 지난 8월28일 평양발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종군 위안부 사건을 추적해온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씨와 아사히신문 기자는 8월25, 26일 평양에서 만난 박씨로부터 “사진에 나와 있는 임신한 여자가 바로 나다. 아기는 포로수용소에서 유산했다”고 확인했다. 니시노씨는 8년 전 위안부에 관한 군인들의 증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참전 군인으로부터 문제의 사진 속 임신한 여성은 ‘와카하루’라는 증언을 확보해 이를 추적해 왔다.
정남용 교수는 “지금까지 여기저기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언은 많지만 북과 남을 통틀어 실제 발굴된 위안소 건물은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 위안소(99년 정교수가 발굴) 하나뿐이다. 그 다음에 위안부들이 어디어디에서 생활했다는 많은 증언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렇게 사진자료와 일본군-연합군 문서, 그리고 본인 증언 세 개가 삼위 일체로 합치되는 것은 이 할머니 하나뿐이다”고 강조했다. 정교수는 “이처럼 증거가 명백한데도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배상을 미룬 채 ‘시간 벌기’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역사에 대한 죄과는 더 커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오는 12월8일 ‘2000 도쿄법정’ 개정 첫날 북한측 검사로 나서는 정교수와 함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증인으로 나서게 될 박영심 할머니는 현재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7년간의 일본군 성노예 생활로 자궁을 들어내고 신경쇠약으로 폐인이 된 박씨는 혼잣몸으로 애육원(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운 아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박씨는 “나는 가정의 행복도, 자식 낳이(출산)를 하는 어머니의 기쁨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뻔뻔스럽게도 과거 죄행을 역사의 흑막 속에 덮어버리려고 갖은 권모술수를 쓰고 있다. 나는 일본 정부가 죄악에 찬 과거를 똑똑히 반성하고 그에 응당한 보상을 하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을 세계의 양심 앞에 호소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주간동아’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의 초청으로 한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10월14일부터 21일까지 일제(日帝)의 일본군 ‘성적 노예’ 범죄 희생 실태를 방북 취재했다. 그러나 ‘주간동아’에서 당초 인터뷰하고자 했던 일제의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의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다. 또 다른 피해자들은 앓아 누워 있거나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육성으로 성노예 범죄를 고발하는 데는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우선 지난 90년 11월 남한에서 창립된 사단법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상임대표 윤정옥)에 이어 92년 8월 북한에서 창립된 민간단체인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종태위·위원장 홍선옥)의 실무 책임자와 전문학자 인터뷰와 실증적 자료를 통해 일제의 성노예 범죄가 북한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0년 전의 일본군 성노예 범죄 문제가 유엔을 통해 국제문제화된 데는 이 두 단체의 활약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북한 현재까지 218명 파악… 43명 공개 증언
그 결과 유엔인권위원회 산하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차별소위)가 채택한 두 차례의 특별보고서는 정식으로 일제의 ‘군대 위안부’를 ‘성적 노예’(sexual slavery)로 ‘군대 위안소’를 ‘강간소’(rape center)로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이 두 단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남한에서는 통상 정신대라는 용어가, 북한에서는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통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는 편의상 두 용어와 ‘성적 노예’라는 표현을 함께 쓴다).
북한에서 종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공식 제기된 때는 1992년 5월3일이다.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에 살던 리경생씨는 자신이 1929년에 강제 연행되어 경남 창원군에 있던 한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의 감시 하에 5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다. 3세 때 부모를 여읜 리씨가 군수공장에 끌려간 것은 남의 집 ‘아이보개’를 하던 12세 때였다. 그러나 리씨와 함께 끌려온 비슷한 또래의 처녀아이 20명은 일본군 장교의 시중을 드는 일부터 시작하다가 몇달 안 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리씨는 하루 평균 20명을 ‘상대’했다. 그러다 16세 되던 해에 임신을 하자 일본군은 리씨의 배를 째고는 태아를 꺼내 패대기를 쳐서 강물에 던지고 다시는 아이를 배지 못하게 한다며 칼로 자궁을 들어내버렸다. 리씨는 1933년 9월 철조망 밑을 파고 생지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으로도 방영된 리씨의 공개증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수많은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리씨의 증언을 계기로 김대일(84·개성시 개풍군 해평리) 윤경애(80·황해도 은파군 구련리) 등 공개증언자들 속속 나타났다. 그런 배경 하에서 그해 8월 종군 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보상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종태위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공개증언 물꼬를 트고, 92년 10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일본의 전시 죄행에 관한 국제회의’를 시작으로 수많은 일제의 전쟁 범죄 관련 국제회의의 ‘단골 증언자’였던 리씨는 ‘고난의 행군’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종태위의 황호남 서기장(58쪽 인터뷰 참조)에 따르면 리경생씨의 증언을 계기로 종태위가 현재까지 조사 발굴한 종군 위안부 피해자는 218명이다. 그 가운데 43명(19.7%)이 공개증언에 나섰다.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80%는 본인과 가족, 혹은 친척들의 반대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종태위는 지난 95년 8월 그때까지 채록한 피해자 40명의 공개증언을 엮은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외침’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 뒤로 현재까지 5년 동안 피해자 3명이 추가로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증언자보다는 고령과 노환으로 죽어간 증언자들이 훨씬 더 많다. 다만 종태위 황호남 서기장은 피해자 218명 중에서 현재까지 사망한 사람이 몇명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95년부터 집중된 자연재해와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통신-행정망의 미비와 인력난을 반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현지까지는 ‘다리품’을 팔지 않고서는 확인하기가 어려울 만큼 행정망이 미비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종태위가 최근 작성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실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위안부에 대한 모집-연행은 일본 정부와 공권력을 배경으로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첫째가 거주지에서 혹은 여행 중에 납치하거나 강제 연행해 성노예 생활을 강요한 경우로 피해자 218명 중 96명(44%)이나 된다. 두번째는 좋은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 속여 위안소에 데려가 억류한 다음 ‘위안부’를 강요한 경우로 이 또한 74명(34%)이나 된다. ‘일제판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이 두 가지 유형이 전체의 78%다. 그 나머지는 일본군 지령으로 위안부 모집에 나선 민간업자에게 빚에 팔려가거나 ‘근로정신대’ 명목으로 모집되었다가 나중에 위안부로 다시 강제 연행된 경우다.
한편 이들의 연행 당시 나이를 보면 △16∼19세가 92명(50.5%) △20∼24세가 54명(29.7 %) △12∼15세가 34명(18.7%)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10명 가운데 7명이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미성년 인신매매’에 해당된다. 그것도 군이 직접 개입한 미성년 인민매매다(‘표’ 참조).
학계에 따르면 약 20만명의 당시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의 존엄과 정조는 물론 생명까지도 유린당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 ‘위안소’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신품은 장교용’이라는 군대 위계질서에 따라 장교한테서 며칠 동안 ‘성 봉사’를 강요당한 뒤 병사들에게 넘겨졌다. 그중 용모가 뛰어난 여성들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전 기간에 걸쳐 ‘장교들의 독점물’이 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위안부’들은 ‘위안소’에 도착한 날부터 일본 이름으로 불리거나 혹은 이름 대신 방 번호로 불렸다. 위안소에서는 위안부들 사이에서조차 말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없었으며 조선말 사용은 금지되었다. 이들은 식사시간과 용변 보는 시간 외에는 방안에서 나올 수 없었으며 24시간 보초병의 감시 속에 있었다.
위안부들에게는 약속된 ‘복무기한’이 따로 없었다. 그들의 ‘복무기한’은 위안소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든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였다. 공개증언에 동의한 43명의 피해자들이 강요당한 ‘복무기한’은 평균 4년 2개월이었다. 그중에는 10년 동안이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원룡화씨(84·황해도 봉천군 대룡리)를 비롯하여 8년 동안이나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 5명, 5년 이상 강요당한 여성이 6명이나 된다. 이들은 고향에 있는 부모 친척들과의 편지 왕래를 할 수 없었으며 사망해도 일본군은 ‘사망통지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안부들은 보통 한 사람이 평일에는 하루 20∼30명 정도, 일요일에는 40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의 ‘위안소 규정’에 따르면 사병들은 비번근무인 1주일에 한번씩 낮에 위안소를 출입하게 돼 있었으나 장교들은 주로 밤에 수시로 출입했기 때문에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위안부 관리 규정에 따른 휴식시간을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또 일제는 성병 예방 및 ‘군수품’(위안부)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병사들에게 콘돔을 지급했으나 병사들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 임신하는 위안부가 발생하면 그 위안부에게 강제 유산약을 주사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군인들에게 쉴새없이 봉사해야 하고 매일같이 당하는 폭행과 보잘것없는 식사로 인해 연약한 여성들은 얼마 못 가 병에 걸리거나 사망했고 자살하는 위안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새로운 위안부들이 보충돼 왔다.
일본군의 조선 위안부들에 대한 만행은 이미 유엔 인권위원회가 채택한 두 차례의 보고서에서도 규정되었지만 그 비참성과 잔인성 면에서 종래의 ‘전시폭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리경생씨의 경우처럼 임신한 위안부들의 자궁을 통째로 들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성병 예방을 핑계로 자궁에 불에 달군 쇠몽둥이를 집어넣기도 했다.
성노예 생활을 거절하는 여성들에겐 온갖 폭행이 가해졌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위안부들을 다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완강히 반항하는 여성을, 군도로 목을 베거나 생식기에 총을 난사하는 것과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써 다른 위안부들을 순종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도망치다가 붙잡힌 위안부들의 온몸에 제재의 표시로 입묵(入墨)까지 해놓았다. 정옥순씨(80·황해도 강령군 사연리)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14세에 일본 국경수비대에 강제 연행된 정씨는 동료 위안부 12명과 함께 중국 광저우(廣州)의 군 위안소에서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쇠몽둥이로 얻어맞고 물고문을 당한 끝에 입묵을 당했다. 일본군은 바늘 같은 것이 많이 붙어 있는 주먹만한 물건에 먹을 붙인 도구를 사용해 입과 혀, 가슴과 배, 심지어는 음부 부위 등 온몸에 ‘도주자의 표식’을 남겼다. 이런 고문 끝에 들판에 내던져진 정씨는 국혜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함께 중국 농민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정씨지만 이런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 채 얼마 전에 사망했다.
리종녀씨(78·황해도 벽성군 옥정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 때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꾐에 빠져 인천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리씨 또한 도망치다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은 다리와 허벅다리에 몽치를 두 개 끼우고 노끈으로 발목과 넙적다리를 묶은 뒤 휘발유를 솜에 적시어 불을 붙여 다리부터 음부까지 지졌다. 리씨는 이때 당한 고문으로 음부의 절반과 자궁 한쪽이 없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난 리씨는 부모에게 “고무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어 그렇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혼자 살던 리씨 또한 지난 95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기자는 종태위 상무위원으로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2000 도쿄국제법정’(60쪽 관련 기사 참조) 북한 검사단의 유일한 검사인 정남용 교수(사회과학원)와의 인터뷰를 통해 상당수의 남한 출신 피해자들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종태위가 발간한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외침’의 표지에 나오는 정금옥 할머니(76·남포시 룡강군 삼화리)도 남한 출신이었다.
“민간인 업소는 철조망 없어… 일본 정부의 조직적 범죄”
경북 영일군 신광면 사흡동 출생으로 9세 때부터 여관집 종살이를 하던 정씨는 15세 때인 1939년 어느 봄날 일본군 장교에게 강제 연행되어 중국 다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정할머니는 첫날 일본군 장교가 한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전장에서 고생하는 일본군을 잘 위안하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임무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일’이 무엇이며 ‘위안’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정씨는, 속옷도 없이 일본식 겉옷만 걸치게 하고 머리채를 잘린 다음 판자로 칸막이를 한 방에 밀어넣어졌다. 광복 후 정씨는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그 밖에도 리복녀(81·함북 화성군 극동노동자구) 박복이(74·함남 신포시 호남리) 리현숙(78·황해도 사리원시 미곡리) 김군숙(77·평북 피현군 대평리) 강영숙(79·평북 운전군 월현리) 최순환(79·강원도 통천군 미평리)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한 출신임이 확인되었다.
리복녀씨는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태생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길을 찾아 중국 동북부의 무단강까지 갔다가 1942년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경남 진주 태생인 박씨는 진주시 문산개화동 구장이 일본으로 보내주겠다고 속여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대만의 ‘기꾸사이로’ 일본 항공군 병영으로 끌려가 일본군 조종사들을 ‘상대’했다. 박씨는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으로 돌아와 60년 17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
서울시 동대문 태생인 리현숙씨는 18세에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으며 구사일생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모가 이미 세상을 뜬 뒤여서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살 수 없어 같이 끌려갔다 살아남은(19명 중 2명) 유일한 동무와 함께 황해도 송림으로 갔다. 역시 서울 태생인 김씨는 여학교에 다니던 1938년 9월 어느날 동창생인 경숙, 영자와 함께 시내 공원에 놀러갔다가 일제의 ‘처녀사냥’에 걸려 부산을 거쳐 중국 선양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함께 간 두 동창생은 일본군에 반항하다 살해당했다. 김씨는 “구사일생으로 도망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매춘업자들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있던 종군 위안소처럼 보초병도 가시철조망도 없었다. 종군 위안부 만행은 매춘업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당시 일본 당국의 조직적인 범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출생인 강씨는 1933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결혼한 기혼자의 몸으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 강씨는 1944년 가을에 도주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45년 12월까지 살다가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서울 노남동 태생인 최씨는 부모를 여의고 서울시내의 한 식당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1942년 6월 한 일본인의 꼬임에 속아 중국으로 갔다가 위안소 생활을 했으며 1947년 중국에서 남편을 만나 1950년 함북 회령으로 들어왔다.
정남용 교수는 “일본군은 종군 위안부를 ‘군수품’으로 취급했으며 강제 연행된 조선 여성들은 조선 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등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부대 배치상황에 따라 이동했다. 이들 가운데 공화국(북한)으로 온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남조선(남한) 출신이다”고 말했다.
지난 92년부터 일본군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을 연구해온 정남용 교수가 조사 발굴한 사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박영심씨(79·남포시 강서구역 청산리)의 경우다.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한 박씨는 14세 때 인근 양복점에 팔려가 식모로 일하다 1938년 3월 일제의 ‘처녀공출’에 걸려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난징으로 끌려갔다. 박씨는 빈 깡통을 매단 가시철조망이 쳐진 군 위안소에서 와카하루(若春)라는 예명으로 3년을 지내다 전황이 확대되자 상하이를 거쳐 미얀마 랭군 부근의 랴슈 위안소로 끌려갔다. 거기서 치욕스런 2년을 보낸 박씨는 다시 동료들(12명)과 함께 미얀마-중국 국경의 최전선지대인 마쯔야마(송산)로 끌려가 매일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하루 30∼40명씩을 상대하다 일본 패망을 맞이했다.
당시 박씨와 함께 미얀마의 격전장에 끌려갔던 위안부 12명 가운데 8명은 폭격에 맞아 죽거나 병에 걸려 죽고, 살아남은 조선 여성 4명은 그 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전쟁포로가 되어 중국 쿤밍포로수용소에서 약 7개월간 억류되었다. 이때 미군이 찍은 ‘임신한 위안부’ 사진에서 동료 3명과 함께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박씨다. 일본군 성노예 범죄 피해자들의 수난을 상징하는 이 사진의 주인공이 박씨라는 사실은 지난 8월28일 평양발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종군 위안부 사건을 추적해온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씨와 아사히신문 기자는 8월25, 26일 평양에서 만난 박씨로부터 “사진에 나와 있는 임신한 여자가 바로 나다. 아기는 포로수용소에서 유산했다”고 확인했다. 니시노씨는 8년 전 위안부에 관한 군인들의 증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참전 군인으로부터 문제의 사진 속 임신한 여성은 ‘와카하루’라는 증언을 확보해 이를 추적해 왔다.
정남용 교수는 “지금까지 여기저기 위안소가 있었다는 증언은 많지만 북과 남을 통틀어 실제 발굴된 위안소 건물은 청진시 청암구역 방진 위안소(99년 정교수가 발굴) 하나뿐이다. 그 다음에 위안부들이 어디어디에서 생활했다는 많은 증언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렇게 사진자료와 일본군-연합군 문서, 그리고 본인 증언 세 개가 삼위 일체로 합치되는 것은 이 할머니 하나뿐이다”고 강조했다. 정교수는 “이처럼 증거가 명백한데도 일본 정부는 사죄와 배상을 미룬 채 ‘시간 벌기’로 버티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역사에 대한 죄과는 더 커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오는 12월8일 ‘2000 도쿄법정’ 개정 첫날 북한측 검사로 나서는 정교수와 함께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증인으로 나서게 될 박영심 할머니는 현재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7년간의 일본군 성노예 생활로 자궁을 들어내고 신경쇠약으로 폐인이 된 박씨는 혼잣몸으로 애육원(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운 아들의 부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박씨는 “나는 가정의 행복도, 자식 낳이(출산)를 하는 어머니의 기쁨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뻔뻔스럽게도 과거 죄행을 역사의 흑막 속에 덮어버리려고 갖은 권모술수를 쓰고 있다. 나는 일본 정부가 죄악에 찬 과거를 똑똑히 반성하고 그에 응당한 보상을 하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을 세계의 양심 앞에 호소한다”고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