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번역`-`출판된 프랑스 만화를 보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프랑스 만화가 대형 판형에 컬러도판으로 고급종이를 사용해야 하고, 앨범 형태의 하드커버까지 제대로 갖추고 나면 판매가가 2만원대를 훌쩍 넘는다. 화집도 아닌 만화책에 그만한 대가를 치를 한국독자가 별로 없다는 게 출판사의 고민이었다. 애초 상업성을 포기하고 유럽의 고급만화를 보급한다는 차원이라면 모를까, 프랑스 만화 출판은 국내 출판사에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98년 5월 드디어 문학동네가 그 모험을 시도했다. 장 클로드 갈 그리고 장 피에르 디오네 등 세 명이 쓴 ‘죽음의 행군’. 장 클로드 갈은 비록 채색은 아니지만 극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로 유명해 평생 5권의 작품집밖에 내지 못했다.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정란씨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전쟁 서사시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존재의 근원적 허무에 대한 매우 깊은 형이상학적 고뇌가 숨어 있다”고 극찬했다.
만화로는 드물게 문단의 호평까지 받으며 ‘죽음의 행군’은 쉽게 초판 2000부를 소화했고 3쇄까지 5000부에 다가섰다. 앞서 벨기에 만화 ‘땡땡’(에르미 지음)이 출판됐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에 비하면 대단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열기는 후속작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서점-대여소 통해 독자 공략
지난해에는 열화당이 만화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그림)를 매년 1권씩 12년에 걸쳐 출판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으나 본격 프랑스 만화를 맛본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 가을 출판사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프랑스 만화를 선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동안 가능성만 타진하던 출판사들이, 한국시장에서 일본만화는 이미 과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이 유럽만화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근 ‘피터팬’ ‘쌍브르’ ‘니코폴’ 3부작을 잇따라 번역한 이재형씨는 “이제 우리도 일본의 ‘망가’(漫畵)에서 벗어나 유럽만화의 예술성을 경험할 차례다. 유럽만화가들은 모두 미술가라 할 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 만화는 온갖 미술표현기법의 시험장이 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새로운 이미지 세대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출판계에서 말하는 프랑스 만화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협의로는 프랑스 국적의 작가가 그린 작품이지만 대개 프랑스어권(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퀘벡 등)의 작품을 아우른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프랑스 만화는 곧 세계의 만화를 가리킨다. 세계만화사에서 프랑스어권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어, 프랑스 걸작만화를 본다는 것은 세계 만화 걸작을 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올 가을 유럽만화를 선보인 3개 출판사(비앤비, 교보문고, 현실문화연구) 모두 프랑스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다.
특히 교보문고가 뫼비우스의 ‘잉칼’(SF물) 과 부크의 ‘제롬 무슈로의 모험’으로 만화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에 많은 출판사들이 고무돼 있다. 그동안 꾸준히 만화이론서를 출판해 온 교보가 유럽만화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그만큼 이쪽 출판의 가능성을 확신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두 작품 외에 부크의 ‘마술사의 아내’, 프랑수아 스퀴텐의 ‘기울어진 아이’, 데이브 매킨의 ‘흑난’으로 ‘그래픽 노블’(장편만화서사 혹은 만화소설로 불림)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이 시리즈 뒤에는 미술평론가 성완경 교수(인하대)가 있다. 성교수는 그림뿐만 아니라 스토리 라인이 탄탄해 성인 독자층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과 유럽만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유머감각이 풍부한 작품들로 시리즈를 구성했다.
부천만화축제(9월30일~10월4일)에 맞춰 발락이 그린 ‘피터팬’과 ‘쌍브르’ 두 권을 펴내 톡톡히 재미를 본 비앤비 출판사도 전위적인 작품보다 친근한 작품들로 다가선다는 전략이지만, ‘피터팬’과 ‘쌍브르’는 대단히 현실 비판적인 작품이다.
‘피터팬’(전 3권 중 1, 2권 합본)은 배리의 동화를 레지스 르와젤이 성인용으로 각색한 것. 런던 빈민가에서 술주정뱅이 어머니와 살아가는 피터가 어느날 팅커벨의 도움으로 네버랜드로 날아가 펼치는 모험을 근간으로, 잔인한 세상에서 고아들이 겪는 애정 결핍의 문제를 다룬다. ‘쌍브르’(이슬레르 작)는 지방귀족 쌍브르와 창녀의 딸 줄리가 펼치는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저주, 살인, 광기, 예술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비앤비는 두 작품을 소프트커버(1만2000원)와 하드커버(1만4000원) 두 가지 형태로 만들어 소프트커버는 대여소를 중심으로 유통하고, 하드커버는 개인 소장용으로 서점판매하고 있다. 하루에 70~80권씩 나갈 정도로 반응이 좋은 상태.
첫 작품으로 엥키 빌랄의 ‘니코폴’ 시리즈를 낸 현실문화연구의 출판의도는 다른 출판사와 차이를 보인다. 스토리 구성, 화면 구성, 드로잉, 색채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니코폴’을 통해 프랑스 만화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빌랄의 니코폴 시리즈는 원래 ‘신들의 카니발’ ‘여인의 함정’ ‘적도의 추위’ 3부작으로 이루어졌으며 12년에 걸쳐 완성됐다고 한다. 이 시리즈가 완성된 92년, 프랑스 서평지 ‘리르’가 선정한 그해 ‘최고의 책’이기도 하다(만화가 문학작품과 경쟁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
성완경 교수는 ‘주간동아’에 연재한 세계만화탐사에서 이 작품에 대해 “SF와 동물적 환상, 스포츠, 정치와 사랑, 그리고 이집트 신화학 등이 한데 뒤섞인 무거운 바로크적 분위기와 끈끈하고 관능적이며 회화적인 표현 등으로 공상과학만화 중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츨판사측은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랑스 원본과 똑같은 판형과 지질 인쇄상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출판사에 비해 2만3000원이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을 붙였으나 제작단가를 감안하면 이조차도 최소한이라고 말한다. 후속작으로 스페인 만화가 프라도의 작품을 제작중이다. ‘죽음의 행군’으로 호평받고도 오히려 다른 출판사에 주도권을 빼앗긴 문학동네측은 올해 ‘애니북스’라는 만화전문출판사를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미국만화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성큼 한국시장을 파고든 유럽만화가 먼저 안방을 차지한 일본만화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98년 5월 드디어 문학동네가 그 모험을 시도했다. 장 클로드 갈 그리고 장 피에르 디오네 등 세 명이 쓴 ‘죽음의 행군’. 장 클로드 갈은 비록 채색은 아니지만 극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로 유명해 평생 5권의 작품집밖에 내지 못했다.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정란씨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전쟁 서사시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존재의 근원적 허무에 대한 매우 깊은 형이상학적 고뇌가 숨어 있다”고 극찬했다.
만화로는 드물게 문단의 호평까지 받으며 ‘죽음의 행군’은 쉽게 초판 2000부를 소화했고 3쇄까지 5000부에 다가섰다. 앞서 벨기에 만화 ‘땡땡’(에르미 지음)이 출판됐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에 비하면 대단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열기는 후속작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서점-대여소 통해 독자 공략
지난해에는 열화당이 만화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스테판 외에 그림)를 매년 1권씩 12년에 걸쳐 출판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으나 본격 프랑스 만화를 맛본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 가을 출판사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프랑스 만화를 선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동안 가능성만 타진하던 출판사들이, 한국시장에서 일본만화는 이미 과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이 유럽만화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근 ‘피터팬’ ‘쌍브르’ ‘니코폴’ 3부작을 잇따라 번역한 이재형씨는 “이제 우리도 일본의 ‘망가’(漫畵)에서 벗어나 유럽만화의 예술성을 경험할 차례다. 유럽만화가들은 모두 미술가라 할 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 만화는 온갖 미술표현기법의 시험장이 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이 새로운 이미지 세대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출판계에서 말하는 프랑스 만화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협의로는 프랑스 국적의 작가가 그린 작품이지만 대개 프랑스어권(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퀘벡 등)의 작품을 아우른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프랑스 만화는 곧 세계의 만화를 가리킨다. 세계만화사에서 프랑스어권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어, 프랑스 걸작만화를 본다는 것은 세계 만화 걸작을 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올 가을 유럽만화를 선보인 3개 출판사(비앤비, 교보문고, 현실문화연구) 모두 프랑스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다.
특히 교보문고가 뫼비우스의 ‘잉칼’(SF물) 과 부크의 ‘제롬 무슈로의 모험’으로 만화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에 많은 출판사들이 고무돼 있다. 그동안 꾸준히 만화이론서를 출판해 온 교보가 유럽만화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그만큼 이쪽 출판의 가능성을 확신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두 작품 외에 부크의 ‘마술사의 아내’, 프랑수아 스퀴텐의 ‘기울어진 아이’, 데이브 매킨의 ‘흑난’으로 ‘그래픽 노블’(장편만화서사 혹은 만화소설로 불림)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이 시리즈 뒤에는 미술평론가 성완경 교수(인하대)가 있다. 성교수는 그림뿐만 아니라 스토리 라인이 탄탄해 성인 독자층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과 유럽만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유머감각이 풍부한 작품들로 시리즈를 구성했다.
부천만화축제(9월30일~10월4일)에 맞춰 발락이 그린 ‘피터팬’과 ‘쌍브르’ 두 권을 펴내 톡톡히 재미를 본 비앤비 출판사도 전위적인 작품보다 친근한 작품들로 다가선다는 전략이지만, ‘피터팬’과 ‘쌍브르’는 대단히 현실 비판적인 작품이다.
‘피터팬’(전 3권 중 1, 2권 합본)은 배리의 동화를 레지스 르와젤이 성인용으로 각색한 것. 런던 빈민가에서 술주정뱅이 어머니와 살아가는 피터가 어느날 팅커벨의 도움으로 네버랜드로 날아가 펼치는 모험을 근간으로, 잔인한 세상에서 고아들이 겪는 애정 결핍의 문제를 다룬다. ‘쌍브르’(이슬레르 작)는 지방귀족 쌍브르와 창녀의 딸 줄리가 펼치는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저주, 살인, 광기, 예술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비앤비는 두 작품을 소프트커버(1만2000원)와 하드커버(1만4000원) 두 가지 형태로 만들어 소프트커버는 대여소를 중심으로 유통하고, 하드커버는 개인 소장용으로 서점판매하고 있다. 하루에 70~80권씩 나갈 정도로 반응이 좋은 상태.
첫 작품으로 엥키 빌랄의 ‘니코폴’ 시리즈를 낸 현실문화연구의 출판의도는 다른 출판사와 차이를 보인다. 스토리 구성, 화면 구성, 드로잉, 색채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니코폴’을 통해 프랑스 만화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빌랄의 니코폴 시리즈는 원래 ‘신들의 카니발’ ‘여인의 함정’ ‘적도의 추위’ 3부작으로 이루어졌으며 12년에 걸쳐 완성됐다고 한다. 이 시리즈가 완성된 92년, 프랑스 서평지 ‘리르’가 선정한 그해 ‘최고의 책’이기도 하다(만화가 문학작품과 경쟁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
성완경 교수는 ‘주간동아’에 연재한 세계만화탐사에서 이 작품에 대해 “SF와 동물적 환상, 스포츠, 정치와 사랑, 그리고 이집트 신화학 등이 한데 뒤섞인 무거운 바로크적 분위기와 끈끈하고 관능적이며 회화적인 표현 등으로 공상과학만화 중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츨판사측은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랑스 원본과 똑같은 판형과 지질 인쇄상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출판사에 비해 2만3000원이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을 붙였으나 제작단가를 감안하면 이조차도 최소한이라고 말한다. 후속작으로 스페인 만화가 프라도의 작품을 제작중이다. ‘죽음의 행군’으로 호평받고도 오히려 다른 출판사에 주도권을 빼앗긴 문학동네측은 올해 ‘애니북스’라는 만화전문출판사를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미국만화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성큼 한국시장을 파고든 유럽만화가 먼저 안방을 차지한 일본만화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