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한 선한 남자가 살았다. 어느날 그에게 물의 신이 ‘곧 대홍수가 일어날 것이니 배를 만들어 피하라’는 계시를 내린다. 남자는 큰 배를 만들어 자신의 가족과 친구, 동물들, 그리고 각종 살림살이와 귀금속들을 그 안에 싣는다. 곧 신이 대홍수를 일으켜 지상의 모든 것들이 물에 휩쓸리지만 남자는 배와 함께 살아남는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실린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성서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 ‘길가메슈’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만 선한 남자의 이름이 노아가 아니라 우트나피쉬팀이고 신의 이름이 여호와가 아닌 엔키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길가메슈의 대홍수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각국 설화도 대홍수 실재론 뒷받침
비단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슈뿐만 아니다. 대홍수의 모티브는 여러 고대문화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의 데우칼리온은 큰 상자 모양의 배를 만들어 대홍수를 피한다. 아일랜드의 옛 전설에도 이와 유사한 대홍수 설화가 있다.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대홍수의 전설을 이야기해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을 놀라게 했다.
세계 방방곡곡의 전설에 동시에 등장하는 대홍수 이야기를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우연이 아니라면 그 답은 하나밖에 없다. 고대에 대홍수가 실재했었다는 가설이다.
대홍수와 관련된 컬럼비아 대학교의 윌리엄 라이언, 월터 피트만 두 교수의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 빙하가 녹으면서 북반구의 해수면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7500여 년 전, 높아진 해수면은 터키 근해의 담수호였던 흑해를 덮쳤다. 흑해는 급격하게 확장되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바다와 연결되었고 흑해 연안의 농경지들은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보스포루스 해협이 수문이 열린 댐 역할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흑해 호수’로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흑해의 해수면은 하루에 15cm씩 높아졌고 흑해로 유입된 바닷물의 양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200배가 넘었다고 한다.
흑해 연안에 살았던 농경민들은 이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운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 역시 대체 어떠한 연유로 호수 주위의 땅이 갑자기 바다로 변해 버렸는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큰 물에 휩쓸려 죽었는지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신이 노해서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말만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 아니었을까. 결국 라이언-피트만의 가설은 ‘노아의 대홍수’와 기막히게 일치되는 셈이다.
더구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 6개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 흑해에서 300km 떨어진 지점에 아라랏트 산이 솟아 있다는 사실은 흑해 대홍수 설에 신비감을 더한다. 아라랏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40일간의 대홍수 후에 안착한 곳으로 창세기에 등장한다. 일찍이 1949년에 미국 CIA는 터키 영토인 아라랏트 산의 정상 부근에서 방주 잔해로 추측되는 유적의 사진을 촬영하는 개가를 올렸다. 1980년대에는 아폴로 15호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이 아라랏트 산에서 ‘방주의 잔해’를 실제로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나무토막들이 과연 방주의 잔해인지를 입증할 길은 없었다. 노아의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추적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난 9월9일 터키의 흑해 연안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흑해의 해저에서 대홍수를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북대서양에서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찾아낸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가 이끄는 조사단 ‘흑해 2000 탐험’ 팀은 흑해의 해저 100m 근처에서 집터의 벽과 지붕, 그리고 기둥의 잔해들을 발견했다. 해저음향탐사선 ‘아르고스’호와 ‘리틀 헤라클레스’호는 이 외에 바닷속에 남아 있는 돌도끼와 그릇조각 등도 촬영해 냈다.
탐사선들이 이 잔해들을 발견한 지점은 심해 100m, 흑해 연안에서 18km나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이로써 7500년 전의 흑해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민물호수였으며 갑작스러운 대홍수가 흑해를 바다로 만들었다는 라이언-피트만의 가설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또한 흑해 해저에서 대홍수 당시 묻혀버린 새로운 고대문명의 흔적을 찾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발라드 팀은 이미 탄소동위원소 분석법을 통해 7000년 전의 흑해는 현재보다 200m 가까이 낮은 해수면을 가진 담수호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흑해 2000 탐험’ 팀의 일원인 프레데릭 허버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내셔널 지오그라픽’과의 인터뷰에서 “흑해 해저에서 인간의 거주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발굴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였다”고 이야기하면서 “흑해의 바닷속으로 80m 이상 잠수한 탐사선이 보내온 화면은 망가진 배의 잔해나 돛만이 드문드문 보이는 여느 바닷속과 전혀 달랐습니다. 직사각형으로 구획지어진 집터가 보였고 심지어 욋가지로 엮은 지붕이나 벽의 회칠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라고 발굴의 순간을 전했다. 허버트 교수는 이번에 찾아낸 집터의 흔적들이 흑해 연안의 고대 농경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최신호에서 ‘몇십 년간 지지부진해 온 성경의 대홍수 탐험이 마침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이 소식을 보도했다. 경험 많은 탐험가 발라드도 이번의 발견이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을 비롯한 기독교계 역시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확인시켜 준 ‘흑해 2000 탐험’ 팀의 발견을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다.
9월19일 터키 문화부는 ‘흑해 2000 탐험’ 팀이 흑해 연안의 항구 시놉을 중심으로 더욱 심도 있는 발굴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길가메슈의 노래처럼 “아득한 옛 이야기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홍수의 전설이 신비의 옷을 벗고 우리 앞에 나타날 날이 머지 않았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실린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성서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 ‘길가메슈’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만 선한 남자의 이름이 노아가 아니라 우트나피쉬팀이고 신의 이름이 여호와가 아닌 엔키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길가메슈의 대홍수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각국 설화도 대홍수 실재론 뒷받침
비단 고대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슈뿐만 아니다. 대홍수의 모티브는 여러 고대문화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의 데우칼리온은 큰 상자 모양의 배를 만들어 대홍수를 피한다. 아일랜드의 옛 전설에도 이와 유사한 대홍수 설화가 있다.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대홍수의 전설을 이야기해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을 놀라게 했다.
세계 방방곡곡의 전설에 동시에 등장하는 대홍수 이야기를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만 할 수 있을까. 우연이 아니라면 그 답은 하나밖에 없다. 고대에 대홍수가 실재했었다는 가설이다.
대홍수와 관련된 컬럼비아 대학교의 윌리엄 라이언, 월터 피트만 두 교수의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 빙하가 녹으면서 북반구의 해수면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7500여 년 전, 높아진 해수면은 터키 근해의 담수호였던 흑해를 덮쳤다. 흑해는 급격하게 확장되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바다와 연결되었고 흑해 연안의 농경지들은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보스포루스 해협이 수문이 열린 댐 역할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흑해 호수’로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흑해의 해수면은 하루에 15cm씩 높아졌고 흑해로 유입된 바닷물의 양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200배가 넘었다고 한다.
흑해 연안에 살았던 농경민들은 이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운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 역시 대체 어떠한 연유로 호수 주위의 땅이 갑자기 바다로 변해 버렸는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큰 물에 휩쓸려 죽었는지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신이 노해서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말만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 아니었을까. 결국 라이언-피트만의 가설은 ‘노아의 대홍수’와 기막히게 일치되는 셈이다.
더구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 6개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 흑해에서 300km 떨어진 지점에 아라랏트 산이 솟아 있다는 사실은 흑해 대홍수 설에 신비감을 더한다. 아라랏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40일간의 대홍수 후에 안착한 곳으로 창세기에 등장한다. 일찍이 1949년에 미국 CIA는 터키 영토인 아라랏트 산의 정상 부근에서 방주 잔해로 추측되는 유적의 사진을 촬영하는 개가를 올렸다. 1980년대에는 아폴로 15호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이 아라랏트 산에서 ‘방주의 잔해’를 실제로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나무토막들이 과연 방주의 잔해인지를 입증할 길은 없었다. 노아의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다 과학적인 추적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난 9월9일 터키의 흑해 연안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흑해의 해저에서 대홍수를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북대서양에서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찾아낸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가 이끄는 조사단 ‘흑해 2000 탐험’ 팀은 흑해의 해저 100m 근처에서 집터의 벽과 지붕, 그리고 기둥의 잔해들을 발견했다. 해저음향탐사선 ‘아르고스’호와 ‘리틀 헤라클레스’호는 이 외에 바닷속에 남아 있는 돌도끼와 그릇조각 등도 촬영해 냈다.
탐사선들이 이 잔해들을 발견한 지점은 심해 100m, 흑해 연안에서 18km나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이로써 7500년 전의 흑해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민물호수였으며 갑작스러운 대홍수가 흑해를 바다로 만들었다는 라이언-피트만의 가설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또한 흑해 해저에서 대홍수 당시 묻혀버린 새로운 고대문명의 흔적을 찾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발라드 팀은 이미 탄소동위원소 분석법을 통해 7000년 전의 흑해는 현재보다 200m 가까이 낮은 해수면을 가진 담수호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흑해 2000 탐험’ 팀의 일원인 프레데릭 허버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내셔널 지오그라픽’과의 인터뷰에서 “흑해 해저에서 인간의 거주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발굴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였다”고 이야기하면서 “흑해의 바닷속으로 80m 이상 잠수한 탐사선이 보내온 화면은 망가진 배의 잔해나 돛만이 드문드문 보이는 여느 바닷속과 전혀 달랐습니다. 직사각형으로 구획지어진 집터가 보였고 심지어 욋가지로 엮은 지붕이나 벽의 회칠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라고 발굴의 순간을 전했다. 허버트 교수는 이번에 찾아낸 집터의 흔적들이 흑해 연안의 고대 농경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최신호에서 ‘몇십 년간 지지부진해 온 성경의 대홍수 탐험이 마침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이 소식을 보도했다. 경험 많은 탐험가 발라드도 이번의 발견이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을 비롯한 기독교계 역시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확인시켜 준 ‘흑해 2000 탐험’ 팀의 발견을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다.
9월19일 터키 문화부는 ‘흑해 2000 탐험’ 팀이 흑해 연안의 항구 시놉을 중심으로 더욱 심도 있는 발굴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길가메슈의 노래처럼 “아득한 옛 이야기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홍수의 전설이 신비의 옷을 벗고 우리 앞에 나타날 날이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