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던 도초도의 하늘에는 동틀녘까지도 구름 한 점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출항시간이 가까워지면서부터 새털구름이 드리워지고 잔잔하던 바다도 거세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7시 정각에 화도선착장을 떠난 배가 도초도 해역을 벗어나자마자 집채만한 파도가 연신 뱃전을 때렸다. 그렇게 몸부림치던 바다도 배가 우이도에 가까워지자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우이도의 첫 경유지는 성촌마을. 애초에는 두번째 경유지인 돈목리에서 하선할 작정이었지만 “돈목선착장쪽에 파도가 높아 배를 댈 수 없다”는 승무원의 말에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바닷가 산비탈에 기대앉은 성촌마을에는 모두 여덟 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 여섯 가구가 이른바 ‘독거노인’이라, 마을 분위기는 고요하다못해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고샅길에서 마주친 한 노인의 얼굴에도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쓸쓸한 마을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성촌마을 주변의 자연풍광은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올 정도로 절경을 이룬다. 마을 북쪽의 큰대치미해변에는 미풍(微風)에도 날릴 만큼 고운 모래밭이 길게 뻗어 있고, 호수처럼 둥그런 남쪽 바다 건너에는 아담한 돈목마을과 숲 좋은 도리산(252m)의 아름다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큰대치미해변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안개처럼 희뿌연 모래바람이 언덕을 타고 오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일대 장관이다.
우이도에는 유별나게 모래가 많다. 여북하면 “우이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곳 말고는 죄다 모래땅일뿐더러 대부분의 해수욕장도 개흙이 거의 섞이지 않은 모래해변이다. 섬 곳곳에 지천으로 흩어진 모래밭은 조수(潮水)와 바람의 변화에 따라 광활한 사막을 형성하거나 기묘한 예술작품을 빚어놓곤 한다.
우이도의 모래바람이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우뚝 솟은 모래산이다. 높이는 80m에 불과한데도 남쪽 비탈은 경사가 몹시 가팔라서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미끄러지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편인 큰대치미해변 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토질이 단단해서 손쉽게 오를 수 있다.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돈목해수욕장과 큰대치미해변 일대의 풍광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중하게 펼쳐진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모래산과 시리도록 해맑은 쪽빛 바다의 어울림도 참으로 절묘하고 독특하다. 다도해 작은 섬이 아니라 중동지방의 광막한 사막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모래산 밑에서부터 넓은 백사장이 이어지는 돈목해수욕장은 우이도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이 단단하고 기울기도 매우 느릿해서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게다가 울창한 해송숲이 백사장을 아늑하게 감싸고, 숲을 지나온 물줄기는 백사장 곳곳에 작은 개울을 이루며 바다로 흘러든다.
돈목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돈목마을에 들어섰다. 먼발치에서는 한적해 보이던 마을은 가까이서 보니 다소 어수선하다. 백사장 위의 시멘트도로는 두 동강이 났고, 갯바위에 묶인 배는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반쯤 물에 잠겼다. 사시사철 싱그런 초록빛의 후박나무 이파리도 칙칙한 밤색으로 얼룩져 있다. 이 모두가 지난 8월 찾아왔던 태풍 ‘프라피룬’이 남긴 생채기라고 한다.
우이도의 행정 중심지는 면 출장소와 보건소가 있는 진리마을이다. 하지만 우이도를 찾는 외지인들은 거개 돈목마을에만 머무르다 돌아간다. 낚시나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도보로 10, 20분 거리에 독특하고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모래산 돈목해수욕장 비밀해수욕장 장고래미장굴 등이 산재해 있거니와 주변의 바닷가에는 우럭 바닷장어 농어 등이 심심찮게 걸려드는 갯바위낚시터가 즐비하다.
그래도 우이도까지 간 걸음에 돈목리만 보고 올 수 없기에 인정 많은 할머니댁에 짐의 일부를 맡겨두고 진리로 향했다. 우이도의 서쪽 마을인 돈목리에서 맨 동쪽의 진리까지는 십리 가량 되는데, 고개 두 곳을 넘고 덤불진 자드락길을 2시간쯤 걸어야 한다. 우이도 주민들은 다른 마을을 오갈 때에 뱃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진리 가는 산길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다. 그래도 길은 뚜렷하고, 그 길의 호젓한 정취가 아주 인상적이다. 이름 모를 새 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을뿐더러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돈목리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첫번째 고갯길을 내려서면 우이도 최초의 마을인 대초리이다. 그러나 450여년 전에 처음 들어섰다는 이 마을은 사람들의 흔적과 지명만 남았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들 대신에 서까래가 땅에 닿을 듯한 집과 담쟁이넝쿨 우거진 돌담과 부유물이 가득찬 우물과 쑥대밭으로 변한 논밭과 그넷줄 매달린 당산나무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 너머의 북녘 땅도 아니고 수몰지역도 아니건만,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이곳에서 나고 자란 누군가들은 이제 실향민이 된 것이다. 안타깝고 허망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폐가는 흔하게 봤어도 폐촌(廢村)을 맞닥뜨린 건 처음이라, 마을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심기가 편치 않았다.
진리마을로 가는 산길 주변에는 소나무와 갖가지 상록수가 빼곡이 들어차 있어 깊은 산골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특히 우이도의 최고봉인 상산봉(359m) 자락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두번째 고갯길을 얼추 내려서자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광경이 간간이 보인다. 일년 내내 방목되는 우이도의 염소는 갖가지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약염소로 비싸게 팔려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 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은 자연산 미역채취와 어업이다.
진리마을은 우이도의 중심지답게 공공건물도 많고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띄었다. 튼실한 방파제가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덕택에 태풍의 피해도 크게 보지 않은 듯했다.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우이도분교(정식명칭은 도초서초등학교 우이도분교장)를 찾았다. 올 봄에 부임했다는 젊은 교사가 전교생 4명을 한자리에 앉혀두고 수업하는 광경이 이채롭기도 하고, 아들딸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정감 있어 보였다.
진리에서 돈목리로 되돌아갈 때에는 정오에 도초항을 떠나 12시30분쯤에 진리선착장에 도착하는 여객선을 이용하면 된다.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선창구미 예리 등을 거쳐 돈목선착장에 닿는 이 신해3호를 타고 가면서도 우이도 남쪽 해안의 절경을 두루 감상할 수가 있다.
우이도의 첫 경유지는 성촌마을. 애초에는 두번째 경유지인 돈목리에서 하선할 작정이었지만 “돈목선착장쪽에 파도가 높아 배를 댈 수 없다”는 승무원의 말에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바닷가 산비탈에 기대앉은 성촌마을에는 모두 여덟 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 여섯 가구가 이른바 ‘독거노인’이라, 마을 분위기는 고요하다못해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고샅길에서 마주친 한 노인의 얼굴에도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쓸쓸한 마을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성촌마을 주변의 자연풍광은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올 정도로 절경을 이룬다. 마을 북쪽의 큰대치미해변에는 미풍(微風)에도 날릴 만큼 고운 모래밭이 길게 뻗어 있고, 호수처럼 둥그런 남쪽 바다 건너에는 아담한 돈목마을과 숲 좋은 도리산(252m)의 아름다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큰대치미해변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안개처럼 희뿌연 모래바람이 언덕을 타고 오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일대 장관이다.
우이도에는 유별나게 모래가 많다. 여북하면 “우이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곳 말고는 죄다 모래땅일뿐더러 대부분의 해수욕장도 개흙이 거의 섞이지 않은 모래해변이다. 섬 곳곳에 지천으로 흩어진 모래밭은 조수(潮水)와 바람의 변화에 따라 광활한 사막을 형성하거나 기묘한 예술작품을 빚어놓곤 한다.
우이도의 모래바람이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우뚝 솟은 모래산이다. 높이는 80m에 불과한데도 남쪽 비탈은 경사가 몹시 가팔라서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미끄러지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편인 큰대치미해변 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토질이 단단해서 손쉽게 오를 수 있다. 일단 정상에 올라서면 돈목해수욕장과 큰대치미해변 일대의 풍광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중하게 펼쳐진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모래산과 시리도록 해맑은 쪽빛 바다의 어울림도 참으로 절묘하고 독특하다. 다도해 작은 섬이 아니라 중동지방의 광막한 사막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모래산 밑에서부터 넓은 백사장이 이어지는 돈목해수욕장은 우이도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이 단단하고 기울기도 매우 느릿해서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게다가 울창한 해송숲이 백사장을 아늑하게 감싸고, 숲을 지나온 물줄기는 백사장 곳곳에 작은 개울을 이루며 바다로 흘러든다.
돈목해수욕장을 가로질러 돈목마을에 들어섰다. 먼발치에서는 한적해 보이던 마을은 가까이서 보니 다소 어수선하다. 백사장 위의 시멘트도로는 두 동강이 났고, 갯바위에 묶인 배는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반쯤 물에 잠겼다. 사시사철 싱그런 초록빛의 후박나무 이파리도 칙칙한 밤색으로 얼룩져 있다. 이 모두가 지난 8월 찾아왔던 태풍 ‘프라피룬’이 남긴 생채기라고 한다.
우이도의 행정 중심지는 면 출장소와 보건소가 있는 진리마을이다. 하지만 우이도를 찾는 외지인들은 거개 돈목마을에만 머무르다 돌아간다. 낚시나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도보로 10, 20분 거리에 독특하고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모래산 돈목해수욕장 비밀해수욕장 장고래미장굴 등이 산재해 있거니와 주변의 바닷가에는 우럭 바닷장어 농어 등이 심심찮게 걸려드는 갯바위낚시터가 즐비하다.
그래도 우이도까지 간 걸음에 돈목리만 보고 올 수 없기에 인정 많은 할머니댁에 짐의 일부를 맡겨두고 진리로 향했다. 우이도의 서쪽 마을인 돈목리에서 맨 동쪽의 진리까지는 십리 가량 되는데, 고개 두 곳을 넘고 덤불진 자드락길을 2시간쯤 걸어야 한다. 우이도 주민들은 다른 마을을 오갈 때에 뱃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진리 가는 산길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다. 그래도 길은 뚜렷하고, 그 길의 호젓한 정취가 아주 인상적이다. 이름 모를 새 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을뿐더러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돈목리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첫번째 고갯길을 내려서면 우이도 최초의 마을인 대초리이다. 그러나 450여년 전에 처음 들어섰다는 이 마을은 사람들의 흔적과 지명만 남았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들 대신에 서까래가 땅에 닿을 듯한 집과 담쟁이넝쿨 우거진 돌담과 부유물이 가득찬 우물과 쑥대밭으로 변한 논밭과 그넷줄 매달린 당산나무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 너머의 북녘 땅도 아니고 수몰지역도 아니건만,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이곳에서 나고 자란 누군가들은 이제 실향민이 된 것이다. 안타깝고 허망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폐가는 흔하게 봤어도 폐촌(廢村)을 맞닥뜨린 건 처음이라, 마을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심기가 편치 않았다.
진리마을로 가는 산길 주변에는 소나무와 갖가지 상록수가 빼곡이 들어차 있어 깊은 산골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특히 우이도의 최고봉인 상산봉(359m) 자락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두번째 고갯길을 얼추 내려서자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광경이 간간이 보인다. 일년 내내 방목되는 우이도의 염소는 갖가지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약염소로 비싸게 팔려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 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은 자연산 미역채취와 어업이다.
진리마을은 우이도의 중심지답게 공공건물도 많고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자주 띄었다. 튼실한 방파제가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덕택에 태풍의 피해도 크게 보지 않은 듯했다.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우이도분교(정식명칭은 도초서초등학교 우이도분교장)를 찾았다. 올 봄에 부임했다는 젊은 교사가 전교생 4명을 한자리에 앉혀두고 수업하는 광경이 이채롭기도 하고, 아들딸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정감 있어 보였다.
진리에서 돈목리로 되돌아갈 때에는 정오에 도초항을 떠나 12시30분쯤에 진리선착장에 도착하는 여객선을 이용하면 된다.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선창구미 예리 등을 거쳐 돈목선착장에 닿는 이 신해3호를 타고 가면서도 우이도 남쪽 해안의 절경을 두루 감상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