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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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감동… 재미… 입맛대로 골라

  • 입력2005-06-22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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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감동… 재미… 입맛대로 골라
    역시 바쁘지 않아야 소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바쁘면 언젠가 시간 날 때 읽어야지 하고 미뤄두다 영영 읽지 못하고 만다. 마치 학창시절 요리조리 피해 읽지 않고 넘어간 필독도서처럼 시간이 흐른 뒤에는 쑥스러워서라도 읽기 어렵다. 이미 속세의 때가 묻어버린 어른들 눈에 박계주의 ‘순애보’가 감동적일 리 없듯이…. 말이 길어졌지만 좋은 책은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읽어두자는 뜻이다.

    올 가을에는 그냥 지나치면 섭섭할 소설들이 잇따라 출간됐다. 그것도 중견작가, 주목받는 30대 작가, 그리고 막 데뷔한 신인작가를 골고루 만날 수 있다.

    시간 순서로만 보면 하성란씨의 ‘삿뽀로 여인숙’이 가장 앞선다.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8월말 경 출간된 이 책은 벌써 4쇄에 돌입해 2만500부 가량이 팔렸다. 상당한 판매 속도다. 출간되자마자 행여 뒤질세라 책 소개를 한 언론도 일조를 했겠지만, 결국 독자들의 안목 덕분이라 생각한다. 시시하면 독자들이 먼저 외면한다.

    줄거리는 쌍둥이 남매 선명이 트럭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한 뒤, 혼자 남은 진명이 10년에 걸쳐 선명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선명이 수학여행에서 샀던 4개의 종이 사건의 발단이다. 종 두 개는 쌍둥이 남매의 방에, 세번째는 고교동창 윤미래의 목에 걸려 있다. 그렇다면 네번째 종은 누가 갖고 있을까. 진명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삿뽀로 여인숙을 찾아가고 환영 속의 인물 고스케와 대면한다.

    추리기법을 따르긴 해도 보통 추리소설처럼 마지막에 모든 것을 속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윤미래는 왜 안나푸르나에 가서 실종됐을까, 진명과 농구선수 김동휘의 관계는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까 등등 마지막 장을 넘겨도 이런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이처럼 작가는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독자들을 교란시킨다. 그러나 절대 맞춰지지 않을 것 같던 조각들은 삿뽀로 여인숙에서 비로소 큰 그림으로 완성된다.



    이 소설로 다소 복잡해진 머리를 조성기씨의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로 달래보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소설 10권쯤 된다”고 하는 게 허튼소리는 아닌 듯싶다. 실존인물(작가가 세 살던 시절 집주인) 이종희씨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은 노인의 인생 넋두리를 그대로 활자로 옮긴 것 같은, 영화로 치면 ‘롱테이크’ 기법의 소설이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상황묘사가 세밀하고 어떤 부분은 한 줄로 끝나버린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원산 부잣집 막내딸이던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과 고향에 부모를 두고 오빠들 손에 이끌려 남으로 피란온 뒤 고생하던 ‘종희의 서러운 시절’, 이렇게 두 편의 짧은 이야기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실향민의 애환을 잘 담아낸다. 저자가 구사한 무기교의 기교가 놀라울 뿐이다.

    이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모던 키즈들의 삶을 그린 이지형씨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로 넘어가자. 조금 아리송하면서도 자극적인 제목은 저자가 탈고를 한 뒤 우연히 시사주간지에 실린 ‘현대’ 왕회장과 그 아들들에 관한 기사를 보고 떠오른 것이라 한다.

    소설은 불륜의 여왕이며 카페의 여왕, 한중연합테러단특수요원 등 종잡을 수 없는 여인 조난실과 변심한 애인을 찾아 나선 식민관료이며 낭만의 화신인 이해명의 연애행각을 축으로 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난실이 알고 보면 거짓말을 밥먹듯하는 뻔뻔한 여자라거나, 조선총독부 서기 이해명을 민족이나 민족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기력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설정한 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뒤집기’다. 식민지의 암울함을 직설법으로 푸는 대신, 돈키호테 같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면서 돌파구 없는 모던 키즈들의 삶을 조롱한다. 저자의 발칙함은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양심 있는 친일파인 이해명의 아버지가 총독부에 땅을 상납한 대신 아들을 총독부에 취직시킨 뒤 이렇게 말한다. “점을 봤더니 (네가) 앞으로 십년 간은 재수가 없어 나가는 곳 족족 망한다니, 비록 총독부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그 역시 조국의 독립에 일조하는 것이므로, 마음 편히 가져라.”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1930년대를 복원해내는 솜씨나 술술 읽히는 문장에서 신인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소설, 정말 재밌다.

    삿뽀로 여인숙/ 하성란 지음/ 이룸 펴냄/ 248쪽/ 7500원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조성기 지음/ 민음사 펴냄/ 192쪽/ 7000원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지형 지음/ 문학동네 펴냄/ 240쪽/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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