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밤거리를 밝혀주던 연등이 비에 젖어 초라하다. 며칠 뒤면 거리에서 깨끗이 치워질 연등들. 사람들은 왜 ‘부처님 오신 날’에 등을 밝힐까.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심지 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으며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덕을 빛으로 하여 삼독(三毒·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을 없앤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다. 씻어내지 못한 삼독을 안고 사람들은 또 무감각하게 한해를 보낼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거리에 등이 걸리고 똑같은 축원이 되풀이되고….
“종교의 목적이 뭘까요.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사찰에는 등 켜는 행위만 있지 그 의미를 가르쳐 주진 않아요.”
사찰 ‘지역문화센터’ 탈바꿈
봉축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 않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도법스님(주지·51)은 수년째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번 초파일에 나는 과연 불교 본연의 사상에 입각해 ‘정법의 길’을 지키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정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했는가.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절에 등을 더 많이 달게 해 수입을 올릴 방법이 없을까’만을 고민한 것은 아닌가.
도법스님은 올해 ‘부처님 오신 날’ 열흘 전부터 야생화 전시회를 열고 지역주민들과 시 낭송회도 가졌다. 초파일에는 지리산댐 건설 반대서명 운동을 벌이고 북한동포돕기 등만들기 행사를 열었다. 같은 장소에서 유기농산물 판매도 했다. 모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정신 없이 봉축행사를 마친 뒤 되돌아본다. 수행자의 외양을 하고서 세속의 가치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는 않았는가. 수행자의 모양새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수행이 된다고 생각하는 안이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그렇다고 생각될 때마다 서글프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불교계 내부 갈등과 돈이 없어 수행하기 어렵다고 탓하는 그릇된 태도다.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어느 원로스님이 “내가 이 정도 차는 타야 하지 않겠나”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것이 한국 불교의 마지막 신음소리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불교와 출가 수행의 길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로지 법과 중생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당당하고 헌칠한 수행자 상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고 다짐도 했다.
도법스님. 불행하게도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조계종 분규를 통해서였다. 94년과 98년 조계종이 종권 장악을 위해 두 파로 나뉘어 극단적인 싸움을 벌였을 때 그는 사태해결 조정자로 나섰다. 그리고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권력도 뒤로하고 훌쩍 실상사로 돌아왔다. 실상사는 도법스님이 90년 청정불교운동을 위해 만든 결사체 선우도량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이 곳에 정착했느냐고 묻는데, 세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째,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홍척국사가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으로, 불교사상운동을 시작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둘째,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고 그 품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좋고 셋째, 다른 사찰에 비해 사찰과 마을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명운동, 농촌살리기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95년 실상사 주지가 된 뒤 도법스님은 사찰을 지역문화센터로 바꿔 놓았다. 과거에는 사찰이 종교적 목적 외에 문화의 공간, 국민 교육의 공간 기능을 했다. 그러나 조선조 500년 동안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역사현장과 유리된 사찰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도법스님이 지난 5년 동안 가꾼 실상사는 이제는 항상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지역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잃어버렸던 전통사찰의 기능을 회복한 셈이다.
도법스님은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됐다. 99년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해 귀농운동, 생활협동조합, 대안교육, 환경연대운동 등을 하나로 묶은 운동을 하고 있다.
요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민족의 성산 ‘지리산 지키기 운동’이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 상임고문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수행자로서 너무 세속의 일을 많이 벌이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스님은 “단순단박한 게 내 삶이오. 그런 운동이야 다 내가 하나요”라고 반문한다.
“기본적으로 불교 세계관에 근거한 일이라면 일단 해보자는 게 내 생각인데, 생태농장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귀농학교를 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대안교육은 어떠냐, 그래서 지리산 살리기 운동까지 하게 된 겁니다. 물론 내가 다 할 수는 없고,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야 그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죠.”
그동안 불교계는 농촌사찰을 외면했다. 그래도 종교 중에서는 마지막까지 버텼다고 하지만 일단 자본주의, 기계문명, 도시화에 휩쓸리다보니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행자들은 곳곳에서 “돈 없어서 불교가 안된다”고 돈타령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법스님은 농촌사찰에서 불교의 회생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농촌은 사회존립의 근본이며 생명의 터전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농촌이 활성화돼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안전을 위해 농촌을 생태적으로 보호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농촌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관광-기도 도량일 경우 유기농산물 매장을 개설한다. 둘째,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사찰공동체를 실현한다. 셋째,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마을공동체를 실현한다. 넷째, 인간화 가족화 생명살림 자립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체험하는 교육장 구실을 한다. 어쨌든 이런 일을 하기에 농촌사찰로서 실상사는 천혜의 장소였다.
“부처님께서도 사찰은 마을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멀면 신자들이 찾아오기가 힘들고, 또 너무 가까우면 수행도량이 소란스러워져서 자기성찰이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내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 농가와 직선거리로 불과 100m밖에 안되는 곳에 사찰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도법스님은 최근 펴낸 산문집 ‘청안청락(淸安淸樂)하십니까’(동아일보사 펴냄)에서 심산유곡에 처박혀 민중과 유리된 사찰과 부처님이 아니라, 방귀 뀌면 냄새나고 피가 흐르고 체온과 감정이 있는 현실 속의 부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실상사의 너른 배추밭은 현실 속의 부처님이 있는 또하나의 사찰이다. 도법스님은 수천 포기의 배추가 어울려 살고 있는 배추밭이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의 바다’라고 한다.
하지만 배추밭과 함께 마음의 밭을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우리 마음의 밭에 있는 맹목적인 이기심, 허영심, 소유욕, 경쟁심 따위의 비인간적인 잡초를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가꾸는 작업을 하지 않는 한 개인소득 10만 달러, 과학기술혁명, 정보화시대가 된다 해도 고통과 불행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심지 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으며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덕을 빛으로 하여 삼독(三毒·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을 없앤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다. 씻어내지 못한 삼독을 안고 사람들은 또 무감각하게 한해를 보낼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거리에 등이 걸리고 똑같은 축원이 되풀이되고….
“종교의 목적이 뭘까요.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사찰에는 등 켜는 행위만 있지 그 의미를 가르쳐 주진 않아요.”
사찰 ‘지역문화센터’ 탈바꿈
봉축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지 않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도법스님(주지·51)은 수년째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이번 초파일에 나는 과연 불교 본연의 사상에 입각해 ‘정법의 길’을 지키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정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했는가.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절에 등을 더 많이 달게 해 수입을 올릴 방법이 없을까’만을 고민한 것은 아닌가.
도법스님은 올해 ‘부처님 오신 날’ 열흘 전부터 야생화 전시회를 열고 지역주민들과 시 낭송회도 가졌다. 초파일에는 지리산댐 건설 반대서명 운동을 벌이고 북한동포돕기 등만들기 행사를 열었다. 같은 장소에서 유기농산물 판매도 했다. 모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다.
분주하게 준비하고 정신 없이 봉축행사를 마친 뒤 되돌아본다. 수행자의 외양을 하고서 세속의 가치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는 않았는가. 수행자의 모양새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수행이 된다고 생각하는 안이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그렇다고 생각될 때마다 서글프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불교계 내부 갈등과 돈이 없어 수행하기 어렵다고 탓하는 그릇된 태도다. 언젠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어느 원로스님이 “내가 이 정도 차는 타야 하지 않겠나”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것이 한국 불교의 마지막 신음소리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불교와 출가 수행의 길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로지 법과 중생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당당하고 헌칠한 수행자 상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고 다짐도 했다.
도법스님. 불행하게도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조계종 분규를 통해서였다. 94년과 98년 조계종이 종권 장악을 위해 두 파로 나뉘어 극단적인 싸움을 벌였을 때 그는 사태해결 조정자로 나섰다. 그리고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권력도 뒤로하고 훌쩍 실상사로 돌아왔다. 실상사는 도법스님이 90년 청정불교운동을 위해 만든 결사체 선우도량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이 곳에 정착했느냐고 묻는데, 세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째,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홍척국사가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으로, 불교사상운동을 시작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둘째,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고 그 품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좋고 셋째, 다른 사찰에 비해 사찰과 마을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명운동, 농촌살리기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95년 실상사 주지가 된 뒤 도법스님은 사찰을 지역문화센터로 바꿔 놓았다. 과거에는 사찰이 종교적 목적 외에 문화의 공간, 국민 교육의 공간 기능을 했다. 그러나 조선조 500년 동안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역사현장과 유리된 사찰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도법스님이 지난 5년 동안 가꾼 실상사는 이제는 항상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지역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잃어버렸던 전통사찰의 기능을 회복한 셈이다.
도법스님은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됐다. 99년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해 귀농운동, 생활협동조합, 대안교육, 환경연대운동 등을 하나로 묶은 운동을 하고 있다.
요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민족의 성산 ‘지리산 지키기 운동’이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 상임고문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수행자로서 너무 세속의 일을 많이 벌이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스님은 “단순단박한 게 내 삶이오. 그런 운동이야 다 내가 하나요”라고 반문한다.
“기본적으로 불교 세계관에 근거한 일이라면 일단 해보자는 게 내 생각인데, 생태농장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귀농학교를 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대안교육은 어떠냐, 그래서 지리산 살리기 운동까지 하게 된 겁니다. 물론 내가 다 할 수는 없고,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야 그들의 활동을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죠.”
그동안 불교계는 농촌사찰을 외면했다. 그래도 종교 중에서는 마지막까지 버텼다고 하지만 일단 자본주의, 기계문명, 도시화에 휩쓸리다보니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행자들은 곳곳에서 “돈 없어서 불교가 안된다”고 돈타령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법스님은 농촌사찰에서 불교의 회생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농촌은 사회존립의 근본이며 생명의 터전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농촌이 활성화돼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안전을 위해 농촌을 생태적으로 보호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계가 농촌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관광-기도 도량일 경우 유기농산물 매장을 개설한다. 둘째,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사찰공동체를 실현한다. 셋째, 생태적이고 자립적인 마을공동체를 실현한다. 넷째, 인간화 가족화 생명살림 자립공동체의 삶을 배우고 체험하는 교육장 구실을 한다. 어쨌든 이런 일을 하기에 농촌사찰로서 실상사는 천혜의 장소였다.
“부처님께서도 사찰은 마을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멀면 신자들이 찾아오기가 힘들고, 또 너무 가까우면 수행도량이 소란스러워져서 자기성찰이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내를 사이에 두고 가까운 농가와 직선거리로 불과 100m밖에 안되는 곳에 사찰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도법스님은 최근 펴낸 산문집 ‘청안청락(淸安淸樂)하십니까’(동아일보사 펴냄)에서 심산유곡에 처박혀 민중과 유리된 사찰과 부처님이 아니라, 방귀 뀌면 냄새나고 피가 흐르고 체온과 감정이 있는 현실 속의 부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실상사의 너른 배추밭은 현실 속의 부처님이 있는 또하나의 사찰이다. 도법스님은 수천 포기의 배추가 어울려 살고 있는 배추밭이야말로 아름다운 ‘생명의 바다’라고 한다.
하지만 배추밭과 함께 마음의 밭을 가꾸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우리 마음의 밭에 있는 맹목적인 이기심, 허영심, 소유욕, 경쟁심 따위의 비인간적인 잡초를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가꾸는 작업을 하지 않는 한 개인소득 10만 달러, 과학기술혁명, 정보화시대가 된다 해도 고통과 불행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