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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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모와 ‘시인과 촌장’

  • 입력2005-12-02 12: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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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모와 ‘시인과 촌장’
    새천년 첫해 상반기 한국 대중음악계의 승자는 역시 조성모였다. 그는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을 ‘어제의 국민가수’로 간단히 제쳤고 같은 세대의 경쟁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들고 나온 상품은 ‘가시나무’를 위시한 어제의 명곡들의 리메이크 앨범이었다.

    리메이크 앨범은 슈퍼스타의 프리미엄이다. 이미 조관우가 ‘님은 먼 곳에’를 타이틀로 한 리메이크 앨범으로 200만장이 넘는 메가히트를 기록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20대 이상의 여성팬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조성모처럼 10대 아이돌 스타가 80년대 곡으로 승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험천만한 시도일 터이지만 그는 간단히 밀리언셀링을 기록하면서 질풍가도를 이어 나갔다.

    어찌 됐건 ‘시인과 촌장’의 팬들, 아니 나아가 80년대 음악세대들은 조성모의 ‘가시나무’가 이른바 N세대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다는 것에 일종의 흐뭇함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전 세대의 유산까지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그 탐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1988년 오리지널과 2000년 리메이크 사이엔 그 숨가쁜 시간의 늪만큼이나 깊은 심연이 드리워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만들고 부른 ‘가시나무’의 핵심적인 아우라(aura)는 종교적인 참회의 서정이다. 이것은 조성모의 새로운 버전에서 서주부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시키는 코러스 효과를 통해 극적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등장하는 당대 톱보컬리스트로서의 조성모의 정결한 곡 해석―이는 앨범 재킷의 순진무구한 모노크롬 톤만큼이나 호소력을 분만한다. 그리고 ‘바람만 불면…’으로 시작하는 전개부에서 조성모의 음반은 편곡에서나 보컬의 호흡에서나 지극한 감정이입을 심어줌으로써 연주자와 청취자 사이의 일체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귀를 씻고 오리지널 버전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시인과 촌장’의 버전은 서주부터 도입까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종소리를 배경으로 극한적으로 절제된 피아노의 반주로 더 이상 순결할 수 없는 환각을 피워올린다.



    이 버전의 하이라이트는 피아노의 둔중한 하모니 사이사이에 숨겨진 침묵과 여백의 깊이다. 이 아스라한 정적감은 우리에게 절대자 앞에 선 자의 왜소하고 초라한 높이를 일깨워주고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의 폭을 혜량하게 해 준다.

    우리가 이 80년대 후반의 명곡을 더욱 진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이 곡의 전작이랄 수 있는, 85년 양희은의 목소리로 발표된 하덕규의 ‘한계령’을 나란히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절대 고독의 내면 풍경을 ‘한계령’이 펼쳐보이고 있다면 ‘가시나무’는 바로 그 고독의 고뇌로부터 구원으로 나아가려는 영혼의 몸부림이다. 어쩌면 당연히도 조성모의 노래엔 그와 같은 처절한 투쟁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잘 훈련된 신세대의 보컬리스트일 뿐이다.

    80년대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지도 않았다. 이 두 버전의 차이는 왜 한국 대중음악의 영광의 시대가 80년대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하지만 조성모의 선풍 속에서 저 오리지널 앨범의 판매량이 급부상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때의 세대들, 그리고 지금 세대들은 이 오리지널 앨범이 들려주는 메시지를 경청할 의무가 있다. 그러지 못할 때 그 시대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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