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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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주의 앞에 고개 숙인 ‘비평’

문학 - 영화 - 연극 등 총체적 부실… “작품 스크린하고 옥석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 있어야”

  • 입력2006-06-27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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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업주의 앞에 고개 숙인 ‘비평’
    한국 문화계의 ‘비평’은 위기상황에 놓여 있는가. 최근 몇 년 사이 문화계 각 분야에서 비평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문학계. 98년부터 99년 사이 계간 ‘창비’(창작과 비평)와 ‘문사’(문학과 사회) 등 문학계의 전통적 에콜(학파)들의 배타성을 지적한 패거리주의, 즉 ‘섹트주의’에 대한 비판이 문단을 뜨겁게 달구었다. 일련의 동인체제 문예지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이 주장의 요지는 “일부 문학집단이 자신들의 문학관을 절대시하고 그 절대적 이념에 맞춰 다양한 작품의 다양한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 이는 곧 특정 문학집단의 ‘권력화’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 ‘출판자본에 대한 비평의 종속’을 낳음으로써 “비평가가 자사에서 선택한 작품을 수동적으로 홍보-광고하는 기능만을 담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문학평론가 한 기)는 주장이다.

    ‘권력화, 상업화한 문학비평’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통렬한 비판’이라는 새로운 비평어법을 구사하는 평론가들, 즉 김정란 강준만 신철하 권성우 등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김정란씨는 조선일보, 창작과 비평, 이문열, 은희경, 최영미 등을 특유의 독설로 맹공해 지난해 ‘신드롬’이라 부를 만한 화제를 낳았으며, 신철하씨는 우리 문학비평계에 “전면적 무시(미친놈 취급), 왕따 만들기(패거리 주의), 상대 섹트와의 이질적 동거, 겁주기(알량한 지적 오만과 과시, 협공) 풍토가 만연해 있다”는 신랄한 비판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아웃사이더’들의 ‘입바른 소리’에 대해 “이전의 비평어법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 기존 평론계를 각성시킨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인정한다”면서도 “이런 어법이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는 점, 즉 그 자체로 높은 ‘상품성’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함정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한 문예지의 편집동인은 “주례사 비평이 문제라지만, 그래도 ‘칭찬’은 적어도 남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판을 ‘사유화’해서 남을 깎아내리는 행위는 상처와 피해를 줄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도정일교수는 “문단의 일부 문제점으로 떠오르는 상존하는 ‘정실관계’가 청산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비평은 그런 ‘내부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좀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학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작업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오히려 이 시대 문화계에서 ‘권력’이 문제시되는 것은 일부 비평집단이 아니라 ‘시장’ 혹은 ‘상업주의’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영화계 역시 상업주의의 팽배로 인해 비평이 제자리를 못찾고 있는 상태. 90년대 이후 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르면서 영화산업계 자체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영화비평은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 평론가 강한섭씨가 비교적 대중의 취향에 ‘먹혀 들어가는’ 평문을 쓰고 있고, ‘키노’의 편집장 정성일씨가 나름의 마니아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영화계에 이렇다 할 자기장(磁氣場)을 형성하는 평론가란 찾기 힘들다.

    “영화는 어느 예술 분야보다 대중적인 텍스트이고, 정보가 다량 공개되어 있다보니 딱히 평론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영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씩’하는 게 요즘 풍토다. 특정 평론가의 글이 영화계나 관객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없고, 평론가가 깊이 있는 혹은 주목받을 만한 장문을 발표할 공간도 거의 없다.”(영화평론가 김영진)

    비평가들이 ‘쓸 공간’을 잃어가는 데 대해 ‘문장 표현력’의 한계를 조심스레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글솜씨로 자신의 의견을 풀어나갈 만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일간지 영화평마저 기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

    그러나 영화비평이 ‘맥을 못추는’ 데는 무엇보다 영화판 자체가 ‘비평적 시각’을 요구하는 ‘예술’의 영역에서 대중의 취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상품’의 영역으로 위치 이동해 가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감독들이 평론가들의 취향을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이라고 꼬집는 것도 영화판도의 빠른 변화속도를 못쫓아가는 비평계의 문제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는 ‘평론가들의 점수와 관객들의 호응이 불일치한’ 작품이 다수 눈에 띄었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평단에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100만 관객을 동원했고, ‘쉬리’ ‘텔 미 썸딩’ 등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그다지 후하지 못했었다. 감독-관객과 평론가의 정서가 그만큼 괴리됐다는 증거다. 심지어 작년 말 개봉된 ‘세기말’에서는 평론가를 빗대어 “영화에 별이나 매기고, 20자 평을 쓰면서 20자도 못지키는 사람들”로 풍자되기에 이르렀다.

    김영진씨는 이같은 영화비평의 ‘위기상황’에 대해 “평론가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개발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즉 기존 저널리즘에 ‘기생’하는 대신 인터넷 잡지나 자체 월간지 등을 만들어 보다 깊이있고 세분화된 전문 비평영역을 일궈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시도의 실마리로, 비평가 임재철씨가 편집주간으로 있는 계간지 ‘필름 컬처’와 올 3월 홍성남 이상용 등 평론가가 준비 중인 인터넷 영화웹진 ‘튜브’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나마 대중예술의 ‘총아’인 영화계에서는 비평의 영역이 살 길을 부단히 모색하는 데 비해 연극비평계는 그 명맥이 그야말로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연극평의 지면은 영화보다도 협소하고, 평론가의 등단 루트도 전무하다시피 하다. 현재 활동중인 젊은 비평가는 90년대 초 등단한 이영미 이화원 김미도 이상란, 90년대 중반 ‘객석’을 통해 데뷔한 김명화 등으로, 83학번 이후의 젊은 평론가는 수혈이 끊어지다시피 한 형편이다.

    “대개 사람들은 연극평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사실 작품을 보고 평을 읽으면 어려울 것도 없는데, 워낙 연극을 보는 관객이 적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으로 연극을 다루는 언론매체가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죠. 일간지에서도 연극평을 대개 기자들에게 맡기는 추세입니다.”(이영미)

    주지의 사실이지만, 연극계는 우리 문화계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많은 자본을 쏟아부은 뮤지컬이나 몇몇 ‘벗기는 연극’ 외에 흑자인 공연이 드문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평론가들도 웬만하면 좋은 평을 써주게 마련이다. 그런다고 평단과 창작자 사이에 금전적 관계가 얽히는 일도 없다. 오갈 돈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런 반면 미술계는 오래 전부터 자본과 비평의 밀착관계가 고질병으로 지적되어온 분야다. 문학이나 영화처럼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는 분야와 달리 미술은 작가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멀다. 비평 역시 대중의 감성에 영향력을 미치고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보다 작가와 화랑, 비평가들 사이의 폐쇄된 서클을 이루고 있다. 자연 작가의 전시회 팜플렛에 현란한 이론으로 포장된 ‘주례사’를 써주거나 작품 거래의 중개상 역할을 하는 서비스맨으로 전락한 비평가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일군의 진보적 의식을 지닌 비평가군이 이런 행태에 대해 반발, 새로운 비평문화를 형성하려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지만, 이들 역시 기존 평단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미술계의 문제점을 공론화한다기보다는 또다른 ‘독자 노선’을 걷는 데 그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게 미술평론가 강성원씨의 이야기다.

    우리 문화계의 비평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결국 ‘상업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 역시 상업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예술작품의 질을 스크린하고 옥석을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비평의 자기자리 찾기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일부 예술 분야에서는 평론의 권력화가 문제시되고 있지만 비평에는 일정한 ‘권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권위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아니라 그 권위를 어떻게 행사하는가이다. 우리 문화계에서 ‘권력집단’으로 행사하고 있는 ‘시장’의 힘에 맞서 ‘좋은 작품’을 가려내고 밀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지닌 권위의 역할이다. 비평은 시대와 끊임없는 불화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도정일 교수)

    “칭찬 일색-비판 부재 한심”

    비평 양심 지키려면 ‘비평에 대한 비평’ 있어야


    인천 새얼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계간지 ‘황해문화’의 편집위원 김명인씨는 최근 문학평론계에 횡행하는 ‘칭찬의 남발’과 ‘비판의 부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특히 평론가들이 작가가 펴낸 책 뒤표지, 혹은 책 광고에 한두 줄짜리 ‘발문’을 써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평소 안면이 있거나 문학적 가치관을 같이하는 작가의 작품을 밀어주고 칭찬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균형을 지키는 것이죠. 이해관계가 얽힌 출판사나 특정 에콜에 소속된 이들끼리 주고받는 비평은 칭찬 일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칭찬이 극한에 달하다 보니 이제 그 이상의 표현을 찾기 힘들 지경이에요. 갓 데뷔해 작품집을 낸 작가에게 ‘대가’ 운운하는 상찬을 하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닐까요.”

    그는 이런 칭찬 위주의 ‘촌평 써주기’를 ‘낯부끄러운 매문 행위’라고까지 질타하며, 평론문화가 작품의 진가를 가릴 수 있는 비평 본연의 ‘변별력’마저 상실하게 만든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문단에서 특정인들이 모여 에콜을 형성하고 응집력을 갖는 것 자체는 부정적인 게 아닙니다. 다만 힘이 안으로 응집하는 구심력과 밖으로 뻗으려는 원심력이 생산적인 긴장을 이뤄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평단의 아웃사이더로 등장한 김정란 진중권 권성우 등은 나름대로 한계와 오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일정 정도 사회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또한 비평의 양심을 지켜내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비평에 대한 비평’ 즉 ‘메타비평’을 꼽는다.

    “물론 메타비평은 감정적으로 치달아선 안되며, 보다 면밀하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메타비평은 기존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비평계의 많은 문제점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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