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시민운동가’인 사람을 만나보면 대개 세 가지 점에서 놀란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안꾸미고 다닐 수가 있을까.’ 남녀를 불문하고 외양이 무척 ‘허름하다’는 첫인상을 받는다. 잠시 후 무엇을 물어도 ‘청산유수’처럼 술술 풀어대는 엄청난 ‘달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의 월급액수를 듣고는 또 한번 놀란다.
시민운동가들은 ‘이슬을 먹고사는 사람’이라 자칭한다. 밖에선 우리 사회의 ‘최후의 도덕적 보루’ 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민운동이 정치가와 경제인에 이어 한국사회에서 ‘제3의 권력’이 되고 있다지만 정작 그 속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 개개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간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시민운동가들의 삶은 어떠할까.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박원석부장(동국대 사회학과 졸업·31)은 1월14일 기자의 방문을 받았을 때 싱글벙글하는 표정이었다. 이날 시위전력으로 10년 동안 검찰의 사찰을 받아 온 한 시민이 검찰의 ‘동향파악 관리카드’를 공개하라고 소송을 내 승소판결을 받았다. 모든 TV방송 저녁뉴스에서 이 일이 비중있게 다뤄졌다. 소송제기에서부터 선고공판까지 사실상 재판을 대리했던 박부장의 ‘작품’이었다.
박부장은 이 맛에 시민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검찰이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엿볼 권리는 없다는 것, 이런 것을 세상에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첫발입니다.” 박부장은 ‘우리 사회는 이랬으면 좋겠다’고 꿈꾼다. 그 다음 이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사업을 벌여 구체화시킨다. 그 결과물로 사회가 실제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최대의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시민환경연구소 선임연구원인 김모씨(서울대 농생물학과 박사과정·35)의 일상생활에선 시민운동가로 산다는 게 어떠한 모습인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김씨는 지난 1년간 ‘지방의제21’연구, 생태도시연구, 21C 한국의 청사진 제시, 공단지역 환경성평가,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문제, 다국적기업의 제3세계 환경파괴 사례조사 등의 활동을 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지금은 보고서나 단행본의 원고를 마무리하며 성공적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답사하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내가 구상하는 ‘신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휴일도 잊고 일만 했습니다.” 집무실 안에선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김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5년전 시민운동가가 됐다. 수입이 무려 70%나 줄었다고 한다. 김씨의 월급은 가족수당과 직책수당까지 합쳐 90만원. 상여금은 없다. 순전히 이 돈으로 그는 부인과 남매를 먹여 살린다.
그의 가족은 서울 노원구 상계쓰레기소각장 옆 19평 전셋집에 살고 있다. 아침마다 소각장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그는 출근한다. 쾌적한 미래도시를 꿈꾸는 환경운동가에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거환경이다. 이 집조차 많은 빚을 내 마련한 것이어서 김씨의 가족이 소각장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 결혼이나 환갑 등 집안행사라도 있으면 겁부터 덜컥 난다고 한다. 부인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하루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시민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에서 돌파구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시민운동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많은 시민운동가들을 좌절하게 한다. 먹고살기가 힘들어 결국 시민단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지방은 사정이 더 심각하다. 충주환경운동연합의 한달 총예산은 인건비를 합쳐 150만원. 이 단체 박일선정책실장(37)은 6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다 올 들어 30만원을 받았다. 그야말로 시민운동가의 희생으로 시민운동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부부시민운동가 중엔 어느 한 쪽이 이직을 하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돈 잘버는 커리어우먼일 것, 구름 잡는 일 한답시고 매일 밤 늦게 들어오는 남자 이해할 것, 집안일 혼자 다할 것’. 우스갯소리로 시민운동가의 아내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라고 한다.
시민단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간사’다. 각 사업별로 간사 1명이 붙어 의제설정-기획-회원확보-전문가 자문-사업비 마련-실행까지 전 과정을 도맡는다. ‘소액주주운동’이나 ‘국회의원 낙선운동’처럼 사업이 ‘뜨면’ 그만큼 보람도 크지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둥 없는 둥 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므로 간사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서울지역 시민단체의 한 간부는 “4년치 의회 속기록을 모두 뒤지는 노력 끝에 95년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의정평가 보고회를 열었는데 이를 보러온 서울시민이 7명뿐이었다. 이럴 때 간사들은 정말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조직이 커지면서 시민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총무, 회계, 회원관리 등 ‘관료적’ 업무를 전담하는 시민운동가들도 늘었다. 이런 데서 발생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시민운동가들은 늘상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경실련 창립멤버인 박병옥정책실장(고려대 사회학과 졸업·39)은 경실련의 꿈과 좌절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경실련은 93년 금융실명제를 쟁취했다. 다음해 한약분쟁을 해결했다. 비닐하우스에 사는 도시빈민들이 영구임대주택의 혜택을 보도록 했다. 경실련은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고 뭐든지 경실련이 나서면 다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만에 빠졌다. 차츰 시민의 목소리에 둔감해졌다. 96년엔 김현철씨 녹화테이프폭로사건, 지난해엔 극심한 내분을 겪었다. 많은 동지들을 떠나보냈다. 지금은 경실련이 고통스럽게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다.”
시민운동가들은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초창기의 ‘지사적 분위기’에서 진일보하자는 움직임이다. 참여연대는 올 들어 시민운동가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또 ‘공채제도’를 도입해 시민운동가 12명을 새로 선발했다. 참여연대 정책부실장 이승희씨(서울대 언어학과 졸업·32)는 “‘청빈’하다고 더 평가받는 시대는 지났다. 경제적 보장이 이뤄질 때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에 ‘안착’된다. 운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정보화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시민운동가에겐 새로운 형태의 ‘자기 정체성 찾기’가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안꾸미고 다닐 수가 있을까.’ 남녀를 불문하고 외양이 무척 ‘허름하다’는 첫인상을 받는다. 잠시 후 무엇을 물어도 ‘청산유수’처럼 술술 풀어대는 엄청난 ‘달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사람의 월급액수를 듣고는 또 한번 놀란다.
시민운동가들은 ‘이슬을 먹고사는 사람’이라 자칭한다. 밖에선 우리 사회의 ‘최후의 도덕적 보루’ 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민운동이 정치가와 경제인에 이어 한국사회에서 ‘제3의 권력’이 되고 있다지만 정작 그 속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 개개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간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시민운동가들의 삶은 어떠할까.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박원석부장(동국대 사회학과 졸업·31)은 1월14일 기자의 방문을 받았을 때 싱글벙글하는 표정이었다. 이날 시위전력으로 10년 동안 검찰의 사찰을 받아 온 한 시민이 검찰의 ‘동향파악 관리카드’를 공개하라고 소송을 내 승소판결을 받았다. 모든 TV방송 저녁뉴스에서 이 일이 비중있게 다뤄졌다. 소송제기에서부터 선고공판까지 사실상 재판을 대리했던 박부장의 ‘작품’이었다.
박부장은 이 맛에 시민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검찰이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엿볼 권리는 없다는 것, 이런 것을 세상에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첫발입니다.” 박부장은 ‘우리 사회는 이랬으면 좋겠다’고 꿈꾼다. 그 다음 이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사업을 벌여 구체화시킨다. 그 결과물로 사회가 실제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최대의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시민환경연구소 선임연구원인 김모씨(서울대 농생물학과 박사과정·35)의 일상생활에선 시민운동가로 산다는 게 어떠한 모습인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김씨는 지난 1년간 ‘지방의제21’연구, 생태도시연구, 21C 한국의 청사진 제시, 공단지역 환경성평가,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문제, 다국적기업의 제3세계 환경파괴 사례조사 등의 활동을 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지금은 보고서나 단행본의 원고를 마무리하며 성공적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답사하고 인터넷을 뒤지면서 내가 구상하는 ‘신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휴일도 잊고 일만 했습니다.” 집무실 안에선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김씨는 대기업에 다니다 5년전 시민운동가가 됐다. 수입이 무려 70%나 줄었다고 한다. 김씨의 월급은 가족수당과 직책수당까지 합쳐 90만원. 상여금은 없다. 순전히 이 돈으로 그는 부인과 남매를 먹여 살린다.
그의 가족은 서울 노원구 상계쓰레기소각장 옆 19평 전셋집에 살고 있다. 아침마다 소각장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그는 출근한다. 쾌적한 미래도시를 꿈꾸는 환경운동가에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거환경이다. 이 집조차 많은 빚을 내 마련한 것이어서 김씨의 가족이 소각장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다. 결혼이나 환갑 등 집안행사라도 있으면 겁부터 덜컥 난다고 한다. 부인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하루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시민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에서 돌파구는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시민운동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많은 시민운동가들을 좌절하게 한다. 먹고살기가 힘들어 결국 시민단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지방은 사정이 더 심각하다. 충주환경운동연합의 한달 총예산은 인건비를 합쳐 150만원. 이 단체 박일선정책실장(37)은 6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다 올 들어 30만원을 받았다. 그야말로 시민운동가의 희생으로 시민운동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부부시민운동가 중엔 어느 한 쪽이 이직을 하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돈 잘버는 커리어우먼일 것, 구름 잡는 일 한답시고 매일 밤 늦게 들어오는 남자 이해할 것, 집안일 혼자 다할 것’. 우스갯소리로 시민운동가의 아내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이라고 한다.
시민단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간사’다. 각 사업별로 간사 1명이 붙어 의제설정-기획-회원확보-전문가 자문-사업비 마련-실행까지 전 과정을 도맡는다. ‘소액주주운동’이나 ‘국회의원 낙선운동’처럼 사업이 ‘뜨면’ 그만큼 보람도 크지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둥 없는 둥 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므로 간사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서울지역 시민단체의 한 간부는 “4년치 의회 속기록을 모두 뒤지는 노력 끝에 95년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의정평가 보고회를 열었는데 이를 보러온 서울시민이 7명뿐이었다. 이럴 때 간사들은 정말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조직이 커지면서 시민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총무, 회계, 회원관리 등 ‘관료적’ 업무를 전담하는 시민운동가들도 늘었다. 이런 데서 발생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시민운동가들은 늘상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경실련 창립멤버인 박병옥정책실장(고려대 사회학과 졸업·39)은 경실련의 꿈과 좌절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경실련은 93년 금융실명제를 쟁취했다. 다음해 한약분쟁을 해결했다. 비닐하우스에 사는 도시빈민들이 영구임대주택의 혜택을 보도록 했다. 경실련은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고 뭐든지 경실련이 나서면 다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만에 빠졌다. 차츰 시민의 목소리에 둔감해졌다. 96년엔 김현철씨 녹화테이프폭로사건, 지난해엔 극심한 내분을 겪었다. 많은 동지들을 떠나보냈다. 지금은 경실련이 고통스럽게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다.”
시민운동가들은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초창기의 ‘지사적 분위기’에서 진일보하자는 움직임이다. 참여연대는 올 들어 시민운동가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또 ‘공채제도’를 도입해 시민운동가 12명을 새로 선발했다. 참여연대 정책부실장 이승희씨(서울대 언어학과 졸업·32)는 “‘청빈’하다고 더 평가받는 시대는 지났다. 경제적 보장이 이뤄질 때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에 ‘안착’된다. 운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정보화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시민운동가에겐 새로운 형태의 ‘자기 정체성 찾기’가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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