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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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물가잡기 포기했나

인플레 우려 속 금융시장 안정 위해 돈풀기… “정부 논리에 끌려다닌다” 비판 높아

  • 입력2006-06-27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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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 물가잡기 포기했나
    한국은행 본관 1층에 들어서면 화강암에 크게 새겨진 ‘물가안정’이라는 부조가 단연 눈길을 끈다. 이만큼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물가안정이라는 말은 경제정책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가가 안정되어야만 대다수의 봉급생활자와 자영업자들은 물론 크고 작은 기업들이 각자 계획에 따라 생업과 생산활동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거시경제 전체가 안정을 찾으면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물가안정의 중요성은 개정 한국은행법을 보더라도 잘 나타나 있다. 한은법에는 한국은행의 설립목적을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또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물가안정이라는 설립목표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

    “금리 조절 시기 놓친다” 우려 목소리

    장황하게 교과서적인 중앙은행 본연의 의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최근 한은이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대세에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13일 금융통화위원회가 올해 통화신용정책운용계획을 확정한 뒤 전철환 한은총재는“올해에도 통화를 여유있게 공급하겠다. 그러나 물가불안이 현재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는 선제적인 통화관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선제적 통화관리란 통화, 즉 돈줄을 조이고 이에 따라 금리도 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말을 풀면 이렇다. 돈을 충분히 풀어 현재의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때 가서 돈줄을 조이고 금리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통화정책담당자가 한해의 정책방향을 놓고 한 말치고는 지나치게 알맹이가 없는 셈이다.

    전총재가 이렇게 골자가 없는 말을 한 데에는 한은이 최근 직면하고 있는 고민이 담겨있다. 대우사태가 터진 뒤인 지난해 8월 이후 한은은 통화정책방향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매월 열리는 금통위는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유동성, 즉 돈을 충분히 공급하면서 물가상승이 발생할 요인들을 면밀히 살펴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돈줄 관리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계속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한은의 이런 방침에도 불구하고 99년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지난 4·4분기부터 상황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국책연구기관의 태두 격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인플레, 즉 물가불안을 막기 위한 선제적인 통화관리의 필요성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 우리 경제는 소비자 물가기준으로 0.8%라는 유례없는 물가안정을 이룩하면서도 높은 성장을 기록해 경제학 교과서에서 불가능하다는 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게다가 오는 2월에야 한은의 공식 발표가 나오겠지만 지난해 우리나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10%를 넘어설 전망이다. 한은은 또 올해 성장률도 7.2%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에도 이 정도 성장률이면 어김없이 물가상승을 동반했다. 실제 경제전체의 총수요와 총공급도 IMF 사태 이후 금융, 실물 부문 경색으로 총공급이 총수요보다 많은 디플레 상태였으나 지난해 경제회복으로 적자는 빠르게 좁혀졌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앞으로는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초과수요, 즉 인플레 상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가 불안에 대해서는 KDI뿐만 아니라 한은 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만큼 최근 실물경제의 성장세가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이다.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대강이 지난해 가닥을 잡았다면 올해 남아 있는 경제정책 최대의 화두는 물가안정이다. 재정경제부가 올해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를 물가안정으로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물가안정을 책임지는 한은(엄밀히 말하면 의사결정은 한은총재가 의장을 맡고 있는 금통위가 하고 한은은 이를 집행하는 기관이다)의 입장은 그리 간단치 않다. 지난해 7월19일 대우사태가 터진 이후 금융시장이 급속도로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우부실은 대우채권을 많이 가진 투신사 부실사태로 이어졌고 정부 돈이 들어가는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통해 현재까지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한은의 역할은 무엇보다 다급한 금융시장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시중에 돈을 푸는 것이었 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풀어 경기 호조에 따라 오름세를 보이는 금리를 찍어누르겠다는 것이었다. 금리가 올라가면 채권가격이 떨어져 채권을 많이 가진 투신사의 환매사태(채권형 수익증권의 환매)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푼다는 것은 인플레 억제와는 정면 배치되는 조치다.

    한은의 논리는 간단하다. 인플레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에 금융시장이 붕괴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은 밖에서는 한은이 인플레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상당수의 경제전문가들은 최근 한은 입장이 통화당국으로서 중립적이기보다 단기적인 현실논리를 앞세우는 정부에 지나치게 끌려다닌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준일 KDI연구위원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지난 2년 동안 한은이 유지했던 저금리 기조는 유효했다” 면서“그러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는 거시경제안정을 위한 정책기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는 정책당국간의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며 “한은법 개정으로 새로 태어난 한국은행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같은 권위와 명성을 얻으려면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정책을 집행해야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가장 바람직한 중앙은행과 중앙은행 총재로 미국 FRB와 앨런 그린스펀 의장을 꼽는다. FRB와 그린스펀 의장이 이같은 명성을 얻은 것은 90년대 초 정보통신, 하이테크 혁명에서 시작된 경기호조를 정권의 변화에 관계없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미세조정하면서 10여년 이상 별 탈 없이 관리해 온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 제3조에도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해야 하며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4월 총선 등으로 정치논리가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또 한은이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통화정책의 와중에서 단기 현실논리에 밀려 버릴 경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년 이후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이같은 문제점들이 불거지면 IMF위기를 간신히 탈출한 우리 경제에 회복 불가능한 큰 주름살을 안겨줄 것은 자명하다. 거시경제 안정의 최종 관리자인 한은이 보다 큰 안목에서 중앙은행으로서의 본분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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