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5

2009.03.03

‘섹스 앤 더 시티’ 작가가 쓴 또 하나의 연애지침서

켄 콰피스 감독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입력2009-02-25 18: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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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앤 더 시티’ 작가가 쓴 또 하나의 연애지침서
    (사례 1)남편 벤(브래들리 쿠퍼)에게서 딴 여자와 잤다는 고백을 들은 제닌(제니퍼 코넬리)은 이상하게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기야 그 얘기를 들은 장소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형 마트이긴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직장동료에게 이 일을 의논하면서도 남편과의 이혼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대학시절 만나 결혼한 만큼 한 번쯤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갈라설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닌은 꽤 매력적인 옷을 입고 남편이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유혹한다. 벤의 사무실에서 섹스를 나눈 제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다시 시작해.” 벤과 제닌은 과연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사례 2)7년째 닐(벤 애플렉)과 동거하는 베스(제니퍼 애니스턴)는 남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전부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일부만을 사랑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겉으로는 늘 결혼이라는 형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닐의 얘기에 동감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에게 프로포즈해줄 것을 기대한다. 결국 베스는 지금 당장 결혼하지 않을 거면 헤어지자며 닐과 갈라선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닐과 헤어진 베스는 매일 우울하다. 동생의 결혼식에 갔다가 심장 발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호하며 집안일을 도맡느라 지친 베스는 어느 날 주방에 쌓인 설거지를 하는 닐을 보자 울음을 터뜨린다. 베스는 다시 닐과 결합한다. 그렇다면 베스는 닐과 결국 그렇게 원하는 결혼식을 치를까.

    가볍고 유쾌한 비현실적인 이야기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켄 콰피스 감독은 ‘청바지 돌려입기’ 같은 영화로 선댄스영화제 등을 통해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려온 인물이다. 그의 신작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이런 류의 영화치고는 2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내내 사랑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사랑해’ 소리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거의) 매일 밤 섹스하고, 아침에 함께 눈을 뜨며, 낮에 일하는 동안 상대가 자기만을 생각해주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물론 정치 논쟁을 벌이고, 경제도 걱정하며, 때론 교육환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때로는 환경보호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랑과 섹스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다. 남자나 여자나 알고 보면 섹스하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서로가 완벽한, 적어도 알맞은 상대를 찾는 데 실패한다는 데 있다.

    안나(스칼렛 요한슨)처럼 완벽한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유부남이기 십상이고, 코너(케빈 코놀리)처럼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자신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는 여자가 있긴 하지만 막상 섹스를 하려 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지지(지니퍼 굿윈)나 메리(드루 배리모어)는 데이트하는 족족 차인다. 지지는 오프라인 데이트를, 메리는 온라인 데이트를 즐기지만 성공률은 제로 수준이다.

    ‘섹스 앤 더 시티’ 작가가 쓴 또 하나의 연애지침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가볍고 유쾌한, 그래서 비현실적인 사랑놀이 이야기를 총집합시킨 로맨틱 코미디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 나름 고민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에피소드들이 가슴에 와닿는 데다 실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겉으로는 행복하고 평온하며, 잉꼬부부인 척 살아가던 벤과 제닌 부부의 불화는 특히 보는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을 찌른다.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늘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베스와 닐의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닐처럼 많은 남성들이 사랑하지만 구속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해설판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love)’이 아니라 ‘사랑하기(loving)’의 기술 또는 방법인데, 현재진행형인 ‘사랑하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심지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고 갈고닦는 것이다. 그 과정을 빨리 이루는 사람이 있는 반면 여러모로 더디고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남녀간의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사랑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가치를 지닌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연애물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 연애와 결혼 문제에 대해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람들은 팝콘과 음료수를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지만,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면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게 된다. 나는 과연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게 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즐거운 척하지만 그만큼 당혹스러운 영화다.

    제니퍼 애니스턴에서 드루 배리모어, 스칼렛 요한슨, 제니퍼 코넬리 등 현재 할리우드 톱 여배우가 총출동하다시피 한 것은 켄 콰피스 감독의 명성 덕일까. NO! 그보다는 이 영화의 원작자인 그렉 버렌트와 리즈 투칠로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미국 인기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다.

    이 영화는 연기보다 제작자로 더 이름을 날리고 있는 드루 배리모어가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드루 배리모어는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영화 만들기에도 바빴을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등의 영화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이번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육감적 연기가 신선한 충격일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이번에 몸 전체를 관능적으로 찌웠다.

    만년 미인 제니퍼 코넬리는 내면연기가 돋보인다. 뛰어난 몸관리 능력을 지닌 제니퍼 애니스턴은 S라인을 숨긴 채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선보인다. 제니퍼 코넬리와 제니퍼 애니스턴 둘 다 마흔 줄에 들어섰다. 여배우들이 40대부터 진짜 순수한 미모를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걸 발견하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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