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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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풀어낸 사랑의 방정식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7-25 17: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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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로 풀어낸 사랑의 방정식

    캐서린 역을 맡은 김지호(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날카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천재소녀의 면모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숫자와 공식들에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수학은 세상의 법칙들을 발견해 ‘증명’하는 학문이며, 그 법칙들에는 삶이 반영돼 있다. 연극 ‘프루프’에는 수학에 깊이 빠지다 못해 수와 일상의 경계를 잃어버린 천재 수학자가 등장한다. “x를 서점이 가득 차는 달로 놓는다. 추운 달의 수가 4에 접근하면 책의 숫자는 무한대로 간다. 미래의 어떤 때보다도 추울 것이다. 추위의 미래는 무한대다.” 평생을 수학이라는 학문 속에서 살아온 노학자의 ‘미친 소리’에서 수학적으로 표현된 ‘삶’을 느낄 수 있다.

    ‘프루프’가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수학자의 삶과 사랑’이다. 주인공은 조금 전 언급한 세기의 수학자에게서 재능과 광기를 물려받은 딸. 정신분열증을 앓던 천재 수학자 로버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며칠 후, 학업까지 포기하며 그를 돌보던 딸 캐서린은 시카고의 낡은 집에 혼자 남아 있다. 로버트를 추종하는 제자 해럴드는 스승의 업적을 찾아보겠다며 매일같이 오는데, 캐서린은 처음엔 그가 아버지의 노트를 훔치러 온 것이 아닌지 경계하지만, 이내 그의 진정성을 믿고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은 해럴드에게 모든 경계심을 풀고 자신이 쓴 증명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노트를 보여주는데, 해럴드는 예상과 달리 캐서린에게 의심의 눈빛을 보낸다. 그 증명은 어느 수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놀라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해럴드가 믿음을 배반했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입는다. 캐서린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언니 클레어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하려는 찰나, 그녀를 찾아온 해럴드는 그 노트를 로버트의 노트들과 면밀히 대조해본 결과 캐서린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며 그녀를 잡는다.

    작품은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들로 전개된다. 극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캐서린의 노트에 적힌 ‘증명’이다. 극의 많은 시간은 노트가 진짜 캐서린의 것인지에 대한 캐서린, 해럴드, 클레어의 논쟁에 할애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노트 주인에 대해 극이 끝날 때까지 확신할 수 없다. 물론 몇 가지 단서는 있지만 의심을 푸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것은 이 연극의 전략이다. 오히려 작품이 이야기하려는 목적은 ‘그 증명이 캐서린의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정을 사실로 만드는 데서 중요한 건 ‘신뢰’가 바탕이 된 확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캐서린이지만, 존재감으로 치자면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로버트다. 그는 캐서린의 상상이나 회상에만 등장하지만, 작품의 모든 사건에 모티프를 제공하며 실제로 등장하는 비중도 크다. 캐서린이 극을 이끌어가기는 해도 실제 주인공은 죽은 로버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캐서린 자체도 로버트의 분신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광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캐서린은 단지 아버지의 분신에 그치지 않고 해럴드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그늘에서 독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서적 긴장감 추리소설 읽는 듯한 지적인 재미

    ‘프루프’는 2001년 토니상 베스트플레이상과 퓰리처상, 드라마데스크상을 받았으며, 영화로도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인물들이 웬만한 관객들은 알아듣기 힘든 이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의 어려움에 상관없이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지적인 재미를 준다는 데 있다. 거기에 수학이라는 학문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적인 감정들이 정서적 긴장감을 형성한다는 것도 한몫한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있는 ‘천재 수학자의 광기’라는 소재가 흥미를 끄는 것은, 바로 이처럼 지적인 호기심을 주는 씨실과 감성적인 날실로 짜인 구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캐릭터 설정에서는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캐서린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점은 노트와 몇몇 군데에서 비쳐진 아버지의 믿음으로 대략 수긍을 얻지만, 광기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는 단서는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숫자로 풀어낸 사랑의 방정식
    여러 차례 공연한 레퍼토리인 만큼 전체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느낌을 주었다. 무대는 낡은 집의 뒷마당으로 꾸며져 있고, 조명도 아침과 저녁 등 시간에 따라 달리하며 자연스러운 채광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무대 출입구에 통일성이 없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고, 마지막의 프로젝션 사용은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남명렬(로버트 역)의 자연스러운 외모와 연기는 단연 돋보였다. 김지호(캐서린 역) 역시 건드리면 부서질 듯, 날카로우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천재 소녀의 면모를 어색하지 않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둘을 제외한 배우들의 연기는 다소 어색했고, 전체적으로 배우들이 소통하며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부분에서는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때문에 디테일이 살지 못하고 작품이 대본에 따라 전개되는 평면적인 인상을 주었다( ~9월7일, 대학로 두레홀 4관, 문의 02-764-8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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