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9

2008.04.01

복수극 ‘주신구라’가 만든 무사의 나라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8-03-26 17: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복수극 ‘주신구라’가 만든 무사의 나라

    우타가와 도유쿠니가 목판화로 제작한 16세기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투 장면. ‘주신구라’는 사무라이들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하는 일본 국민서사시다.

    한국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손순 설화나 ‘심청전’처럼 효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반면 일본에는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무라이들의 이야기가 많다. 에도(江戶) 시대에는 봉록과 저택을 몰수당하고 무사 신분을 평민으로 떨어뜨리는 가이에키(改易) 때문에 낭인(浪人)이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낭인들이 공공연하게 ‘집단행동’을 한 것은 아코 사건이 유일하다. 이들이 벌인 주군을 위한 복수극을 다룬 작품이 일본의 국민서사시 ‘주신구라’(忠臣藏, 민음사)다.

    1701년 아코 번(赤穗藩)의 다이묘인 아사노 다쿠미노카미(淺野內匠頭)가 개인적 원한으로 에도의 최고 의전담당관인 기라 고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에게 칼을 휘두르고 만다.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기라가 아사노를 심하게 모욕한 게 화근이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는 아사노에게 할복을 명하고 아코 번의 재산을 몰수한다. 폐번이 된 아코의 사무라이들은 떠돌이 낭인 신분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아코 번의 가로(家老·최고 가신)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內藏助)는 아사노의 아우에게 언젠가는 가문을 계승하고 주군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면서 아코 번의 사무라이들을 결집한다. 이후 그들은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낸다. 간페이는 아내 오카루를 유곽에 팔아넘기는 일까지 감내하고, 고나미는 복수를 위해 떠나는 리키야와 하룻밤뿐인 부부의 연을 맺는다. 기헤이는 아내와 이혼하고 어린 자식의 목숨도 내놓는다. 하지만 120여 명의 동지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이는 47명뿐이었다. 오야마다처럼 동료의 돈 3냥과 옷가지를 훔쳐 달아난 파렴치한도 있었다.

    주군 위해 복수한 뒤 할복 … 일본 국민서사시로 꼽혀

    1702년 1월30일 큰 눈이 에도성을 뒤덮던 날, ‘어떤 산도 군주의 은혜보다 가볍고, 한 가닥 머리카락도 신하의 목숨보다 무겁다(萬山不重君恩重, 一髮不輕我命輕)’는 한문 대구가 새겨진 단도를 찬 오이시 이하 47명의 아코 사무라이들은 기라의 저택으로 잠입, 원수의 목을 치는 데 성공한다. 네 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모두 무사했다. 기라 쪽은 사망자 16명, 부상자 20여 명이었다. 오이시는 막부 감찰관의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 자수의 뜻을 밝히고 센카쿠지(泉岳寺)의 주군 무덤에 기라의 머리를 바친 뒤 막부의 처분을 기다린다. 이들은 나중에 막부의 명에 따라 모두 할복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는 데라사카 기치에몬(寺坂吉右衛門)이었는데, 그는 오이시의 명을 받고 ‘산증인’이 되어 유족에게 사건의 정황을 알렸다. 그 후 ‘주신구라’는 일본의 정신을 표상하는 국민서사시로 칭송받으며 일본인들에게 입이 마르고 닳도록 리바이벌되고 있다.



    가토 도오루(加藤徹) 메이지대학 법학부 교수는 저서 ‘한문의 소양 : 누가 일본문화를 만들었는가(漢文の素養―誰が日本文化をつくったのか?)’에서 아코 사건을 ‘문(文·주자학)과 무(武·군사학)의 투쟁’, 즉 ‘일본의 사상전’으로 본다. 당시 문치(文治) 정치를 편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기라에게는 아무런 벌을 주지 않고 아사노에게만 할복을 명했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복수에 성공한 아코 47인의 사무라이, 이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찍이 에도 막부의 관학인 주자학을 비판한 한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아코 번으로 숨어들어가 ‘손자병법’의 정수를 이어받은 야마가류의 군사학을 강의했다. 심리전, 사상전 등을 중시하는 그의 병학은 아코 번의 무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오이시 구라노스케가 야마가 소코에게 병학을 배웠다.

    사실 오이시는 기라의 목을 친 직후 영예롭게 전원 할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의 합당함을 막부에 알리고 막부의 대응을 기다렸다. 가토 도오루 교수는 이것이 오이시의 진짜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오이시가 주군의 진짜 원수이자 무단파(武斷派)의 대립 세력인 ‘문치파 지도자’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괴롭히기 위해 사상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실제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무척 괴로웠다. 막부가 장려하는 주자학의 처지에서 보면, 목숨을 바쳐 주군의 원수를 갚은 아코 무사들은 충성스런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의사로 치켜세우면 아사노를 할복하게 한 막부의 결정은 오류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쇼군의 무오류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코 무사들을 처형하든, 사면하든 막부와 쇼군의 권위는 크게 상처를 입게 된다. 만약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무단파 정치가라면 그 정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쓰나요시는 스스로 유학 강의를 할 정도로 문치파였다. 그래서 야마가류의 군사학을 배운 오이시는 교묘한 사상전과 심리전으로 쓰나요시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한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코 번 47인 사무라이들에 대한 처우 논쟁이 오갔다.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는 구명을, 오규 소라이(荻生 徠)는 할복을 주장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오규 소라이의 의견을 채택해 아코 번 무사들에게 할복을 명했다. 그 결과 오이시를 비롯한 무단파 아코 번 의사들의 역사적, 사상적 승리를 웅변하는 ‘주신구라’는 연극 영화 소설 등으로 반복, 재생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치파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암흑 군주(暗君)’로 지금도 일본 서민들에게 인기가 없다. 결국 오이시는 자신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한 셈이다. 그래서 가토 도오루 교수는 아코 사건을 일본 역사상 최초의 사상전으로, 또 무(武)를 숭배하는 이들이 주자학적인 이데올로그(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수로 삼아 승리한 싸움이라고 한다.

    서양 계몽주의 택했다가 청일전쟁 이후 무사도 재평가

    이준섭 경북대 일문과 교수의 ‘주신구라-47인의 복수극’(살림)에 따르면, 1868년 11월 메이지 천황이 센카쿠지에 칙사를 파견해 아코 낭인의 행동을 의사로 찬미하도록 한 이후, 주군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야기는 충군애국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골자가 된 텍스트였다고 한다. 또한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하게 산화한 47인의 아코 낭인은 죽음의 미학이라는 일본적 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가 폐지되었고 사무라이 계급도 사라졌다. 이들은 무사도를 일시적으로 버리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선두로 서양의 계몽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무사도는 재평가를 받는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850년대 서양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데 성공한 뒤 자신감을 회복한다. 일본의 ‘고유한 가치관’을 갖자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때마침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의 저서 ‘무사도’(1900)가 나온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나 침략을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武)의 정신이다. 만주국을 세울(1932) 무렵에는 철학자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가 무사도를 일본 국민의 도덕과 일치시킨 ‘무사도의 본질’을 발표한다. 그래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에서 일본의 무사도 붐은 일본이 무력을 전면으로 내세운 정책을 펼치려는 시점과 때를 같이한다고 말한다. 가토 도오루 교수의 말마따나 그 붐의 터전을 닦은 것은 ‘주신구라’였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