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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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보다 쓸모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

설계·의료·게임 등 효용분야 무궁무진 … 노약자·장애인 위한 가상여행도 등장할 듯

  • < 이 식/ 과학칼럼니스트·이학박사 > honeysik @yahoo.com

    입력2004-12-30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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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보다 쓸모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영화나 게임을 떠올린다. 실제 가상현실은 그동안 적잖은 할리우드 영화에 양념처럼 등장해 왔다. ‘토탈리콜’의 주인공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혼동하고 ‘매트릭스’에서는 컴퓨터가 생성한 가상공간을 사람이 현실로 착각한다. ‘폭로’에서 누명을 뒤집어쓴 마이클 더글러스는 가상현실을 이용, 회사의 기밀서류에 접근해 데미 무어의 음모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가상현실은 영화나 만화, 또는 SF소설에서 가장 흔히 채택하는 소재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은 더 이상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미래기술이 아니다.

    진짜보다 쓸모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
    가상현실이란 컴퓨터 그래픽스와 사운드 등 컴퓨터의 여러 기능을 이용해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여 인위적으로 창조한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퀘이크’ ‘툼 레이더’ 같은 컴퓨터 게임이 가상현실을 응용한 전형적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효과적으로 쓰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9월 초 대전의 슈퍼컴퓨팅센터를 방문한 일리노이 대학교의 제이슨 리 교수는 “가상현실은 크기가 매우 작거나 큰 물체를 보거나, 직접 다루기에는 위험한 일들을 경험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원격지에 위치한 연구자들이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하지 않고도 공동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는 말로 가상현실의 유용성을 설명했다.

    진짜보다 쓸모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
    ‘마이크로코스모스’는 벌레들의 하루를 놀라울 만큼 섬세한 카메라워크로 잡아낸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화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세계에 들어가 벌레들을 직접 만져보고 탐험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가상현실 속에 쥐라기 공원을 구현하면 영화에서처럼 공룡에게 습격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공원을 거닐 수 있다.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게임 속의 라라 크로포트나 페르시아 왕자가 되어 ‘실제로’ 게임을 즐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설계 분야에서도 가상현실 시스템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신도시, 공장, 빌딩, 고속도로 등의 설계도면을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전환한 후 그 세계에 들어가 미리 체험해 보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도면상에서 놓치기 쉬운 실수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 가상현실은 태풍이나 차량과 건물의 충돌 등 큰 규모의 실험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분양할 때 짓는 모델하우스도 가상현실로 대체할 수 있다. 가상현실 속에 만든 아파트에 들어가 여러 종류의 벽지나 페인트, 내장재를 골고루 사용해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손쉽고 간편할까. 다양한 가구를 직접 배치해 볼 수도 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무거운 가구라도 한 손으로 또는 한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보다 쓸모 있는 ‘가상현실의 세계’
    가상현실은 초고속 슈퍼컴퓨터와 결합할 때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슈퍼컴퓨터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수를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하여 가시화하면 해석이 매우 쉬워진다. 쉬운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슈퍼컴퓨터로 가상현실을 구현하면 자동차 충돌실험 결과를 여러 각도에서 입체로 볼 수 있다. 차 밖은 물론이고 운전석에서 실제로 사고를 체험할 수도 있다. 가상공간에서의 실험으로 자동차 업계는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고 개발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의료분야 역시 가상현실이 유용하게 쓰이는 분야다. 가상현실 공간에서 해부학이나 수술연습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과 동영상을 이용하여 대인공포증·고소공포증·운전공포증 등의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해 임상실험에 들어갔다. 심장박동 시뮬레이션 결과를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가져오면 심장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혈액의 흐름이나 심장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인공심장의 설계에 큰 도움을 준다. 전투기 조종사의 훈련 등에는 이미 가상현실 시스템이 널리 쓰인다. 운전연습이나 면허시험도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하면 쉽고 안전하게 치를 수 있다.

    가상현실 세계를 과학이나 공학 분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는 영문학 수업에 가상현실을 사용한다. 할렘을 배경으로 쓴 문학작품을 단순히 텍스트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시스템 속에 할렘을 구현한다.

    노약자나 장애인의 복지, 또 관광이나 여행업계도 가상현실을 응용할 수 있는 분야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장시간의 비행이나 시차 적응에 대한 염려 없이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콜로세움 안을 거닐 수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나 백야, 남극의 펭귄을 구경하고 바다 속을 탐험하기도 한다. 이동에 필요한 시간, 여행 경비는 물론, 환경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경주문화엑스포2000의 가상현실 영상관은 고대 경주 시가지를 재현해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상현실을 체험하기 위해 널리 쓰는 방법은 특수하게 제작한 고글형 안경을 쓰는 것이다. 이 밖에 쌍안경을 사용하거나 모니터로 가상현실을 보기도 한다. 현재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시스템은 일리노이 대학교의 가시화연구소(http://www.evl.uic.edu)에서 만든 케이브(cave) 시스템이다. 케이브는 이름 그대로 동굴형 시스템이다. 전방은 물론 좌우측면과 밑면에 스크린을 배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가상현실 공간 안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특수장비다. 이 시스템에서는 사람이 스크린에 둘러싸일 뿐만 아니라, 시선이나 움직임에 따라 화면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시스템보다 현실감이 뛰어나다. 최근 국내 최대 규모인 5면으로 이루어진 케이브 시스템인 ‘시모어’(SeeMore)를 도입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원장 조영화) 슈퍼컴퓨팅센터는 매주 화요일에 이 시스템을 일반에 공개한다.

    케이브와 같은 몰입형 가상장치를 광대역의 인터넷에 연결하면 미국-한국처럼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이나 장비가 가상공간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다. 원격지에 떨어진 실험장치를 직접 다루거나 원격지 수술도 가능하다. 단순한 화상회의가 아니라 실제 눈앞에서 펼쳐진 3차원 자료를 가지고 3차원으로 나타나는 상대방과 직접 교감을 나누면서 가상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다.

    1930년대 최초의 비행 시뮬레이션을 개발한 이래 가상현실 연구는 지속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미 1937년 할리우드에서는 최초의 3차원 입체영화 ‘3차원 살인’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윌리엄 기브슨과 브루스 스털링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에 의해 가상현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가상현실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컴퓨터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1990년 이후다.

    이상적 가상현실 시스템은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뇌를 직접 조작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가상현실과 실제공간을 착각하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술이다. 이에 비하면 사람의 눈이나 귀 등의 오감을 속이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고 안전하다. 현재의 가상현실 시스템들은 모두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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