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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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누비는 ‘한국미술 전도사’

동주 갤러리 이경은 관장 … 장애 딛고 기획한 ‘현대미술展’ 곳곳서 성황

  • < 윤필립/ 시드니 통신원phillip@yesnet.com.au >

    입력2005-02-01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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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누비는 ‘한국미술 전도사’
    지난 4월22일, 호주국립 SBS-TV에서는 프랑스 국립오페라단이 일본 현지에서 제작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했다. 같은 날, 캔버라의 호주국립미술관에서는 ‘일본 속의 모네’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시회가 개막되었다. 전시회는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 전시를 시작으로 전국순회 전시에 들어갔다. 역시 같은 날, 호주 시드니 록스 지역의 켄돈 갤러리에서는 ‘한국현대미술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는 호주국립방송국의 전파를 타거나 국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럴듯한 전시회는 아니었지만, 연중무휴로 열리다시피 하는 일본문화행사의 와중에서 가뭄에 콩 나듯 열리는 한국문화행사인 탓이었는지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었다.

    “왜 한국에는 푸치니나 모네 같은 예술가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푸념하던 한 한국인이, 의족을 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누군가를 반갑게 맞았다. 동주 갤러리 이경은 관장(48). 이 관장의 오랜 친구인 주한호주대사관 전 공보관 피터 샤빌이 전시회장을 찾은 것이다. 그는 지난 99년 열렸던 ‘한국현대미술전’에 이어 2001년 전시회가 성황을 이룬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록스까지 달려온 것이다.

    더 이상 뒤돌아보고 싶지 않지만 이관장은 IMF 직후의 참담하던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도 종종 등골이 오싹해지곤 한다. 개점휴업 상태의 미술시장과 소장작품들의 가격폭락 등. 그러나 혼자만 당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하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운영하던 화랑도 인사동을 떠나 양평동으로 옮겨야 했다. 동주 갤러리와 함께 동고동락하던 많은 작가들도 그림물감을 사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역설적이지만 이관장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때마침 창고 같은 양평동 화랑에서 작품을 정리하던 이관장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물주인이 문득 해외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한 것이다. 순간 이관장은 무릎을 치며 호주에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주의 중견화가 이반 보그와 주한호주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하던 피터 샤빌 등이 그들이다.

    지난 97년 이관장이 동주 갤러리 기획으로 이반 보그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 피터 샤빌 등 호주대사관 직원들의 헌신적 도움으로 성공리에 전시회를 마친 적이 있었다. 먼저 피터 샤빌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한 후라며 성심성의껏 도와준다고 했다. 이반 보그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진작부터 한국화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호주에 소개하고 싶다는 말을 해오던 터다. 문제는 작품을 호주로 옮기는 일이었다. 해외전시 경험이 전무한 이관장은 미술작품을 발송, 통관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은 두 달 내내 대성황이었다. 당초에 한 달 예정으로 기획하던 전시회가 ABC방송국과 호주화단의 요청으로 인해 두 달로 늘어난 것. 별다른 홍보도 없이 갑작스럽게 기획한 전시회가 큰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호주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큰힘이 되었다. 당시 한인동포들 사이에서는 IMF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모국을 돕자는 간곡한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이경은 관장은 그림 속에 묻혀 태어나고 커온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서양화와 서예부문에서 일가를 이루던 이병호씨(79년 작고)다. 누나 이행로씨는 동숭아트갤러리 관장이고, 아내 차연우씨는 중견 서양화가다.

    이관장이 기획하고 진행한 전람회는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보증수표와 같았다. 지난 88년 서울시와 공동주최로 서울 대학로에서 가졌던 ‘88올림픽 조각대전’은 지금도 조각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성공적인 전시회였다. 그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 중에는 이관장이, 발 끝부터 살이 썩어가는 ‘버거스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라야 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의족을 한 상태로 열정을 불태우던 모습도 함께 기억한다.

    이관장에게 버거스병이라는 희귀병이 찾아온 것은 한창 일할 나이던 30대 중반 무렵이었다. 선천적 장애였다면 모를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희귀병 앞에서 이관장은 한때 생을 포기하려 했을 만큼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다리 치료를 위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 이관장은 치료 대신 다리를 자른 채 의족을 끼고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 비행기에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국에서 장애인은 신체적 불편과 함께 장애인을 업신여기는 사회적 편견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물론 이관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 장애 못지않은 사회적 편견과 맞서기 위해 몸이 정상이었을 때보다 더욱 그악스럽게 살아야만 했다.

    화랑사업뿐만 아니라 화랑업계 사람과 함께하는 운동경기에서조차 이기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화랑업계 종사자 대부분이 즐기는 골프를 사치스런 운동이라 외면하다 장애인이 된 후 의족을 이끌고서야 시작해 1년 만에 싱글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로 매사에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때로는 열등의식의 발로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장애인을 우습게 보는 한국사회의 잘못된 풍조에서 버텨낼 수가 없었다.

    호주 누비는 ‘한국미술 전도사’
    이러한 그의 부지런함 덕에 호주에서 이관장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불굴의 의지’는 말이 결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전시회를 준비하려면 수도 없이 그림을 걸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며 며칠씩 밤을 새우는 것은 보통이다. 지난 3월에 개최한 멜버른 전시회를 위해 화물차에 작품을 가득 싣고 불편한 다리를 끌고 장장 13시간 동안 야간운전하는 그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이관장이 호주화가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전시회를 통해서다. 서울아트페어에 호주화가들을 초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자국의 예술작품을 한국화단에 소개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주한호주대사관 직원들의 정성에 이관장은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지난 99년부터 시작된 호주에서의 ‘이경은 성공신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멜버른 전시회가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얻은 데 이어 시드니에서 두 번째로 열린 록스 전시회도 연장전시 요구가 이어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관장은 단호하게 전시연장을 거절했다. 호주에서의 작업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관장은 호주에 한국작품만 전시하는 상설 갤러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미술 작품이 호주 땅에 뿌리내리려면 상설전시밖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경은 관장의 성공신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IMF 이후 거의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미술계에서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린 사람은 많이 있었겠지만, 과감한 결단과 실천으로 경제난을 타개하고, 그보다도 백 배 소중한 한국미술의 해외소개라는 일거양득을 얻어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주국립미술관에서 ‘일본 속의 모네’ 특별전을 관람하던 이경은 관장은 혼자말을 하듯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언젠가 호주국립 TV는 ‘명성왕후’를 방영하고, 국립미술관은 ‘한국현대미술대전’을 여는 날이 오리라.”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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