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가능성이 있는 날에 성관계를 했군요. 자세한 검진을 원하면 진찰대에 올라가고, 원하지 않으면 그냥 처방하겠습니다.”
5분. ‘응급피임약’을 처방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의사는 성관계를 가진 일시, 마지막 생리 시작일, 생리 주기 등을 짧게 물은 뒤 바로 처방했다.
직장여성 김모(33) 씨는 2005년 초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자친구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졌다. 다음 날 배란일을 따져보다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씨는 점심시간에 큰맘 먹고 산부인과에 갔다. 오전 내내 불안해하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매우 쉽게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았고, 곧바로 복용했다. 약 복용 후 약간의 메스꺼움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후 김씨는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다. 2년 전 결혼한 그는 현재 아이가 없다. 김씨는 “예전에 10여 차례 복용한 응급피임약이 임신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또는 약 때문에 장애아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봤지만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낙태 논란이 불거지면서 피임, 특히 불시의 성교에 대처하는 응급피임(또는 사후피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응급피임은 피임 없이 성관계를 가진 이후 임신을 막는 피임법으로, 약으로 복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응급피임약은 고용량의 호르몬제(황체호르몬의 일종인 레보놀게스트렐 1.5mg)로 배란을 방해하거나 수정란의 착상을 차단한다. 산부인과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으로, 약의 종류에 따라 1알 또는 12시간 간격으로 2알 복용한다.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복용하면 피임 가능성이 95%에 이를 정도로 효과가 좋지만, 48시간 내에 복용하면 85%, 72시간 내에는 58%로 떨어진다.
응급피임약 사용, 전체의 0.8%
국내 최초의 응급피임약 ‘노레보’(현대약품)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월.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시판 중인 응급피임약의 종류도 노레보원(현대약품), 포스티노원(바이엘쉐링제약) 등 7개로 늘었고 시장 규모도 48억원 정도로 커졌다(2009년 기준). 약 190억원 규모인 일반 먹는 피임약 시장의 4분의 1에 이른다. 바이엘쉐링제약 김혜빈 PM(Product Manager)은 “일반 먹는 피임약이 국내에 들어온 지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은 10년이 채 안 됐는데, 매해 시장이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일반 피임약에 비해, 응급피임약은 한 번만 먹으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그래서 한 번 복용한 사람이 재복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렇듯 지난 10년간 응급피임약의 인지도와 활용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상담소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피임방법으로 응급피임약을 사용한 경우는 전체의 0.8%에 불과했다. 특히 강간 등 응급피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은심 활동가는 “평소 응급피임약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않는 한, 성폭행 피해를 당해 경황이 없는 피해자가 72시간 이내에 산부인과를 찾아가 처방받고 약을 복용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 의약품처럼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에서의 활용도가 오히려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대학생 강모(21) 씨도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성관계를 가진 뒤 하루 이틀 고민하다 응급피임약 복용 시기를 놓치고, 다음 생리 때까지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일반 피임약처럼 산부인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미국 등 대다수 국가에서는 응급피임약이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다. 우리도 응급피임약 복용률을 높이기 위해 일반 의약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피임연구회 이임순 회장(순천향대 의과대 산부인과 교수)은 “응급피임약은 다량의 호르몬을 일시에 복용하는 것으로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런 약품을 일반 의약품으로 전환하면 남용할 우려가 있다”면서 “미혼 여성들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산부인과를 찾을 수 있도록 의식이나 문화를 개선해야지, 산부인과를 꺼린다고 전문 의약품을 일반 의약품으로 바꾸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CHA 의과학대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강진희 교수도 “산부인과 진료라고 해서 모두 ‘내진(자궁 입구까지 검진하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응급피임약의 경우 환자 개인이 원치 않으면 내진 없이 처방한다”고 덧붙였다.
태아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응급피임약에 대한 과장되거나 잘못된 인식도 많다. 응급피임약은 복용 후 속이 메스껍거나 두통 증상이 나타나고 며칠 동안 출혈이 이어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건강한 여성이라면 참을 만할 부작용이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호르몬제인 응급피임약은 체내에 남아 있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
또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불임이 되거나 장애아를 낳는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역시 호르몬 성분이 몸에 축적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알지 못해 생겨난 오해다. 현대약품 주찬길 주임은 “노레보가 출시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불임이나 장애아 출산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신고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면서 “더구나 응급피임약 복용 후 임신한 경우에도 약이 태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의 한 연구소에서 응급피임약을 복용한 후 임신한 여성 36명과 응급피임약을 먹지 않고 임산한 여성 80명을 대상으로 출산율, 낙태율, 자연유산율, 사산율 등을 비교했는데, 두 집단 간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이 밝혀졌다. 또 신생아의 키나 몸무게도 두 집단 간 차이가 없었다. PDR(Physician’s Desk Reference) 자료에서도 “응급피임약 성분이 태아의 성장과 발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단,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몸에 내성이 생겨 피임 효과가 떨어진다. 또한 호르몬 체계가 교란돼 생리가 늦게 시작하는 등 생기 주기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이 회장은 “응급피임약은 말 그대로 ‘응급한 상황’에만 사용해야 한다”면서 “평소엔 응급피임약보다 피임 효과가 확실하고 호르몬 농도가 낮아 부작용도 거의 없는 일반 먹는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상자기사 참조).
성교육에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취재 중 만난 대다수 평범한 여성은 물론, 성폭력예방 단체 관계자마저 응급피임약에 대해 잘 모르거나, 부작용에 대한 과장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없애려면 성교육에 응급피임약 관련 내용을 꼭 넣거나, 응급피임약 복용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분. ‘응급피임약’을 처방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의사는 성관계를 가진 일시, 마지막 생리 시작일, 생리 주기 등을 짧게 물은 뒤 바로 처방했다.
직장여성 김모(33) 씨는 2005년 초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남자친구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졌다. 다음 날 배란일을 따져보다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씨는 점심시간에 큰맘 먹고 산부인과에 갔다. 오전 내내 불안해하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매우 쉽게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았고, 곧바로 복용했다. 약 복용 후 약간의 메스꺼움이 느껴졌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후 김씨는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다. 2년 전 결혼한 그는 현재 아이가 없다. 김씨는 “예전에 10여 차례 복용한 응급피임약이 임신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또는 약 때문에 장애아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봤지만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낙태 논란이 불거지면서 피임, 특히 불시의 성교에 대처하는 응급피임(또는 사후피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응급피임은 피임 없이 성관계를 가진 이후 임신을 막는 피임법으로, 약으로 복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응급피임약은 고용량의 호르몬제(황체호르몬의 일종인 레보놀게스트렐 1.5mg)로 배란을 방해하거나 수정란의 착상을 차단한다. 산부인과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으로, 약의 종류에 따라 1알 또는 12시간 간격으로 2알 복용한다. 성관계 후 24시간 내에 복용하면 피임 가능성이 95%에 이를 정도로 효과가 좋지만, 48시간 내에 복용하면 85%, 72시간 내에는 58%로 떨어진다.
응급피임약인 노레보원(앞)과 포스티노원.
국내 최초의 응급피임약 ‘노레보’(현대약품)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1월.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시판 중인 응급피임약의 종류도 노레보원(현대약품), 포스티노원(바이엘쉐링제약) 등 7개로 늘었고 시장 규모도 48억원 정도로 커졌다(2009년 기준). 약 190억원 규모인 일반 먹는 피임약 시장의 4분의 1에 이른다. 바이엘쉐링제약 김혜빈 PM(Product Manager)은 “일반 먹는 피임약이 국내에 들어온 지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은 10년이 채 안 됐는데, 매해 시장이 1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일반 피임약에 비해, 응급피임약은 한 번만 먹으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그래서 한 번 복용한 사람이 재복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렇듯 지난 10년간 응급피임약의 인지도와 활용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상담소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피임방법으로 응급피임약을 사용한 경우는 전체의 0.8%에 불과했다. 특히 강간 등 응급피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은심 활동가는 “평소 응급피임약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않는 한, 성폭행 피해를 당해 경황이 없는 피해자가 72시간 이내에 산부인과를 찾아가 처방받고 약을 복용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 의약품처럼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에서의 활용도가 오히려 떨어진다”고 강조했다.
대학생 강모(21) 씨도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성관계를 가진 뒤 하루 이틀 고민하다 응급피임약 복용 시기를 놓치고, 다음 생리 때까지 가슴앓이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일반 피임약처럼 산부인과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미국 등 대다수 국가에서는 응급피임약이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다. 우리도 응급피임약 복용률을 높이기 위해 일반 의약품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성교육에서 일반 피임법은 물론 응급피임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태아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응급피임약에 대한 과장되거나 잘못된 인식도 많다. 응급피임약은 복용 후 속이 메스껍거나 두통 증상이 나타나고 며칠 동안 출혈이 이어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건강한 여성이라면 참을 만할 부작용이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호르몬제인 응급피임약은 체내에 남아 있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
또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불임이 되거나 장애아를 낳는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역시 호르몬 성분이 몸에 축적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알지 못해 생겨난 오해다. 현대약품 주찬길 주임은 “노레보가 출시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불임이나 장애아 출산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신고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면서 “더구나 응급피임약 복용 후 임신한 경우에도 약이 태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의 한 연구소에서 응급피임약을 복용한 후 임신한 여성 36명과 응급피임약을 먹지 않고 임산한 여성 80명을 대상으로 출산율, 낙태율, 자연유산율, 사산율 등을 비교했는데, 두 집단 간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이 밝혀졌다. 또 신생아의 키나 몸무게도 두 집단 간 차이가 없었다. PDR(Physician’s Desk Reference) 자료에서도 “응급피임약 성분이 태아의 성장과 발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단, 응급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 몸에 내성이 생겨 피임 효과가 떨어진다. 또한 호르몬 체계가 교란돼 생리가 늦게 시작하는 등 생기 주기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이 회장은 “응급피임약은 말 그대로 ‘응급한 상황’에만 사용해야 한다”면서 “평소엔 응급피임약보다 피임 효과가 확실하고 호르몬 농도가 낮아 부작용도 거의 없는 일반 먹는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상자기사 참조).
성교육에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취재 중 만난 대다수 평범한 여성은 물론, 성폭력예방 단체 관계자마저 응급피임약에 대해 잘 모르거나, 부작용에 대한 과장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없애려면 성교육에 응급피임약 관련 내용을 꼭 넣거나, 응급피임약 복용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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